“이러다 스페인처럼 대정전 날라”…국회입법처, 전력시스템 독립 규제기관 신설 촉구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5.06.21 06:00

전력 수요자와 공급자 급증으로 시스템 불안정성 커져
정전은 단순 불편 아닌 국가 에너지안보, 경제안보 위협
산업부 산하 기관이 운영과 규제 동시 맡아 감시 권한 분산
원자력안전위 수준 독립성과 전문성 갖춘 감독 체계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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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전력은 저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이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일치하지 않고 어느 범위를 벗어나면 단 10초만에 대규모 광역정전 사태가 벌어진다. 지난 4월 말에 발생한 스페인, 포르투칼 대정전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도 태양광 등 전력 공급자와 전기차 등 전력 수요자가 급증하면서 전력시스템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어 이에 대한 제도적 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철저한 관리감독을 위해 중앙부처와 한전으로부터 독립된 규제기관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전은 단순 사고 아닌 국가 안보 위협"…전력계통 안전 규제 공백 지적

21일 전력업계에 따르면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주요국 광역 정전 사례를 통해 살펴 본 국내 정전 예방의 과제' 보고서를 통해 광역정전 예방을 위해 전력산업에 있어 '규제와 진흥의 분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공식화하며, 전력계통 안전을 전담하는 독립 규제기관 신설이 시급하다고 제안했다.



입법조사처는 보고서에서 “전력계통의 붕괴는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국가의 군사·경제 안보와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라며, “전력망 안전에 대한 체계적인 감독과 규제가 사실상 공백 상태"라고 우려했다.


현재 원자력 분야는 원자력안전위원회라는 독립 규제기구가 존재하지만, 전력계통 안전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관들이 직접 운영과 규제를 동시에 맡는 구조다. 이에 따라 중대한 시스템 오류나 연쇄 정전 사고에 대한 사전적 감시와 사후 조사 권한이 분산돼 있다는 것이 핵심 문제다.




보고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력계통 안전 규제 기능을 독립 기관에 이관해 △정전 사고 조사 및 원인 분석 권한 △계통영향평가와 정전 위험 예측 권한 △EMS(전력계통운영시스템) 기능 감시 권한 △망 보강 및 송배전 인프라 개선 지시 권한 △송전망 접근 중립성에 대한 감독 기능 등의 권한을 부여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기존의 산업부·한전·전력거래소가 수행하는 기능의 일부를 제도적으로 분리하자는 취지로, 전력계통 안전에 '원자력안전위원회' 수준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감독 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보고서는 또 다른 구조적 문제로 실시간 전력계통 정보의 분산을 꼽았다. 현재 송전망 운영은 전압 수준에 따라 한국전력과 전력거래소가 나눠서 관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사고 발생 시 정보 수집과 판단에 시간차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전 방지를 위한 실시간 분석 시스템(RTCA), 자동 주파수 제어 시스템(AFC), 전력계통운영시스템(EMS) 등이 기술적으로 구축돼 있음에도 실제 작동하지 않거나 활용되지 않고 있다는 감사 결과도 함께 제시됐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전력계통 관련 정보의 수집·분석·활용을 일원화할 수 있는 전담 정보기관 지정도 함께 검토할 것을 권고했다.


해외는 정전 예방 기술과 규제 프레임 이미 도입

주요국 광역정전 현황과 원인. 자료=국회입법조사처

주요국 광역정전 현황과 원인. 자료=국회입법조사처

해외 주요국은 이미 정전 예방을 위한 독립적 제도와 기술적 시스템을 다수 도입하고 있다.


미국은 2005년 '에너지정책법'(Energy Policy Act)을 통해 신뢰도 기준과 복구 절차(EOP: Emergency Operation Procedure)를 법제화했고, 독립 규제기관인 NERC(North American Electric Reliability Corporation)가 실시간 모니터링과 사고 조사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유럽 또한 ENTSO-E 등 유럽 계통운영자 연합체가 실시간 정전 예방 시스템을 운용하고, 국가 간 송전망 사고에 대해 공통된 예방 기준(n-1 규칙 등)을 공유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2011년 전국 정전 사고 이후 기술적 장치 확충은 있었으나, 제도적 틀은 여전히 운영자 중심의 구조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다.


극한기후·사이버공격·분산발전 확대…리스크는 더 커진다

보고서는 또한 기후위기와 산업구조 변화로 인해 정전 위험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태풍, 산불, 혹한 등 자연재해는 송전탑이나 연료공급에 큰 영향을 주며, 사이버 해킹은 제어 시스템을 교란해 고의적인 정전 유발도 가능하다.


여기에 태양광·풍력 등 비동기성 분산형 발전기의 확대는 전력계통의 주파수 안정성에 부담을 준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지난 4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발생한 정전은 직류 기반 소형 발전기들의 연쇄 탈락과 송전선 손상이 원인이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보고서 말미에서 “광역 정전은 기술 문제이기 이전에 정책과 제도의 문제"라며, “전기사업법 개정을 통해 독립 규제기관 설립 근거와 권한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계통 복구 능력(Black Start) 향상을 위한 법적 근거 마련, 복구 자원 확보 의무화, 재생에너지 기반 설비에 대한 기준 마련 등도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전력계통 안전에 대한 규제 공백이 지적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국회 공식 보고서에서 이를 명시하고 독립 규제기관 신설을 제안한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의 교차점에 선 지금, 대한민국은 '정전 없는 전력망'이라는 가장 기초적 안전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답을 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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