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말 가뭄 호수 수위 낮아져
온난화 계속되면 가뭄 심해질 듯
선박 통행 줄고 시간도 오래 걸려
철도 활용 ‘건조 운하’ 대안 등장
20억 달러 저수지 건설까지 검토

▲지난 8월 15일 파나마 운하의 아과 클라라 갑문을 화물선이 통과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세계 해상 물동량의 3~5%를 처리하는 파나마 운하가 기후변화와 강대국 갈등이라는 이중 위기에 흔들리고 있다. 2023년 기록적 가뭄으로 선박 통행량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 데 이어,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갈등까지 겹치며 운하의 안정성이 시험대에 올랐다.
◇ 물동량 반토막…수치로 드러난 가뭄 충격
2023년 파나마 운하의 핵심인 가툰(Gatún) 호수 수위가 크게 내려가면서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파나마운하청(ACP)에 따르면 평상시 하루 36~38척이던 통과 선박이 2023년 12월에는 18척까지 줄었다. 통과 척수 축소는 단순한 물류 지연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에 직격탄이 됐다.
서울시 면적의 70% 수준인 가툰 호수는 배가 다니는 수로이면서 운하 갑문 작동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호수 수위가 낮아지면서 통상 50피트(15.24m)였던 선박 흘수 제한이 44피트(13.41m)로 강화됐고, 선박당 적재량은 10~15% 감소했다. 흘수(draft)는 선박이 물에 떠 있을 때 선체 바닥에서 수면까지의 수직 거리를 말한다.

▲파나마 운하와 가툰 호수 (자료=Geophysical Research Letters, 2025)

▲(자료=Geophysical Research Letters, 2025)
선박은 흘수, 즉 물에 잠기는 깊이가 안전 수심보다 깊으면 바닥에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운하 당국은 최대 허용 흘수를 제한한다. 흘수가 얕아지면 선박이 실을 수 있는 화물의 무게도 줄어들어 적재량 감소가 불가피하다.
2021년 평균 3.1일이던 운하 진입 대기 시간도 2023년 8월에는 9.8일로 3배 이상 늘어났다. 일부 선박은 통과 슬롯 확보를 위해 최대 400만 달러(약 55억 원)를 추가 지불해야 했다.
운하 전체 물동량은 2023회계연도 기준 5억 1100만 톤으로 집계됐으며, 이는 전년 대비 7% 감소한 수치다. 운하 수입은 33억 달러(약 4조 5000억 원)로 파나마 국내총생산(GDP)의 약 3%를 차지한다.
◇ 21세기 말 '건조 운하' 현실화하나
과학자들은 이번 사태가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 노스이스턴대 연구팀은 최근 고해상도 기후모델로 파나마 운하를 시뮬레이션한 결과를 '지구물리학 연구 회보(Geophysical Research Letters)'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온실가스 고배출 시나리오(SSP5-8.5)에서 21세기 말 가툰 호수의 연간 최저 수위는 평균 25.2m로 떨어져, 과거(25.5~25.8m) 변동 범위를 벗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고배출 시나리에서는 특히 '10년에 한 번' 발생하던 저수위 극한 현상(수위 1m 이상 저하)의 발생 주기가 대폭 짧아질 전망이다.

▲(자료=Geophysical Research Letters, 2025)
반면 저배출 시나리오(SSP1-2.6)에서는 수위가 과거 수준을 대체로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온실가스 감축이 운하 운영의 안정성과 직결됨을 시사한다.
ACP는 위기 대응책으로 기존 철도·도로를 활용하는 '건조 운하(dry canal)'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20억 달러(약 2조 6000억 원)를 들여 인디오 강에 신규 댐과 저수지를 건설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는 수천 명 주민의 이주 문제와 생태계 파괴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또한 갑문 용수 재활용 시스템은 수위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가툰 호수의 염도를 2020년 대비 7배 이상(0.05 → 0.35ppt) 높일 것으로 예상돼 식수 공급과 해양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 미·중 갈등, 운하의 지정학 리스크 확대
기후 위기와 더불어 정치적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 “중국이 운하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며 “파나마 운하를 미국에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이는 1999년 미국에서 파나마로 운영권이 이양된 이후 최대 외교적 파장을 낳았다.
트럼프의 표적은 홍콩계 기업 CK허치슨이 운영하는 발보아·크리스토발 항만이다. 파나마 정부는 즉각 반발하며 “단 1㎡의 영토도 양보할 수 없다"고 맞섰고, 수도에서는 트럼프 얼굴을 불태우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후 미국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CK허치슨의 항만 운영권 인수를 추진하면서 갈등은 일단락되는 듯하지만, 중국은 “해양 패권에 굴하지 말라"며 반발하고 있다. 운하가 미·중 신냉전의 전장으로 부상하는 모양새다.

▲지난 20일 파나마 항만 회사가 운영하는 파나마 운하 발보아 항구에 선박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사진=AP/연합뉴스)
◇ 한국 경제에도 파급효과
파나마 운하는 한국에도 중요한 물류 경로다. 전체 한국 해상 수출입 물량의 5~6%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한다. 미국 동부와 남미로 향하는 자동차·철강 제품은 대부분 파나마 운하를 경유한다. 통행 제한이 장기화되면 대체 항로(남아메리카 최남단 우회)로 최대 2주 이상 운송 기간이 늘어나 물류비가 30~40% 상승할 수 있다.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LNG·원유 일부도 파나마 운하를 통한다. 통행 지연 시 에너지 가격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
벌크선과 컨테이너선 운임은 이미 2023년 가뭄 때 평균 20~30% 올랐고, 일부 구간은 2배 이상 치솟았다. 이는 한국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에 직접적 부담으로 작용한다.
전문가들은 물류 다변화 전략 수립을 제안하고 있다. 북극항로와 멕시코 횡단 철도, 미국 서부 항만 등 대체 루트 활용 가능성을 본격 검토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장기 물류 계약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선사와 장기 운송 계약을 늘려 운임 급등 시 충격을 완화할 필요도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