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연료 밀어붙이는 트럼프의 역설
AI 데이터센터 등 ‘전력 수요’에 무력화된 정책 리스크
현대에너지솔루션·OCI 등 국내 재생에너지 관련주도 ‘방긋’
美 연준 금리인하·저평가 등도 호재
▲풍력터빈(사진=로이터/연합)
기후변화가 사기극이라고 주장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암울할 것으로 예상됐던 글로벌 청정에너지 관련주들이 오히려 고공행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드릴 베이비 드릴' 구호를 앞세워 화석연료 산업을 장려하고 있지만 정작 석유 관련주들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15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S&P 글로벌 청정에너지전환 지수(S&P Global Clean Energy Transition Index)는 올해 들어 44% 급등해 뉴욕증시를 대표하는 S&P500 지수의 연 상승률(16%)을 크게 웃돌고 있다. 이 지수는 재생에너지를 포함해 저탄소 기술을 제공하는 기업들로 구성됐으며 미국 상장사들의 비중이 가장 높다.
개별 종목으로 보면 미국 수소연료전지 기업 블룸에너지 주가가 328% 급등했고 세계 최대 태양광 인버터 및 에너지저장장치(ESS) 생산업체 중 하나로 꼽히는 중국 양광전력은 137% 상승했다. 유럽에서는 지멘스에너지 주가가 두 배 이상 뛰었다.
국내 증시에서도 재생에너지 관련주들이 크게 올랐다. HD현대에너지솔루션의 연 상승률은 200%에 육박하고 OCI홀딩스, 한화솔루션, SNT에너지 등도 각각 80%, 74%, 74% 가량 올랐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으로 수혜가 예상됐던 S&P 글로벌 오일 지수는 올해 11%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인공지능(AI) 대장주인 엔비디아 주가도 올 들어 30% 가량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초 취임 후 화석연료 산업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재생에너지 산업을 공격해왔다. 그는 지난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기후변화를 “세상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달에는 미 에너지부가 산하 국립재생에너지연구소(NREL)에서 '재생에너지(Renewable Energy)'라는 표현을 삭제하고, '국립로키연구소(National Laboratory of the Rockies)'로 명칭을 바꾸는 등 이른바 '재생에너지 지우기'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AI 데이터센터 등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재생에너지의 역할은 갈수록 부각되고 있다. 블룸버그는 “시장 참가자들은 전력 수요가 너무 커 '빅오일'(거대 석유기업)만으로 충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전했다.
블룸버그NEF(BNEF)는 AI 학습과 서비스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가 향후 10년 내 4배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데이터센터는 가장 빠르게 전력 사용이 늘어나는 분야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분석됐다.
▲반기별 글로벌 재생에너지 투자 규모 추이(단위:10억달러, 자료:BNEF)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결국 '재생에너지와의 전쟁'에서 물러설 수 있다는 낙관론도 제기된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헬렌 주얼 최고투자책임자(CIO)는 “트럼프 대통령은 추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해 모든 형태의 에너지를 포용하는 방식으로 갈 것"이라며 “2026년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는 새로운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선 재생에너지 투자 확대가 이어지고 있다. BNEF에 따르면 올 상반기 글로벌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규모가 전년 동기 대비 10% 증가한 3860억달러(약 570조원)로 집계,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미국의 경우 재생에너지 투자 규모가 지난해 하반기 대비 36% 감소한 반면, 유럽연합(EU)은 육상·해상 풍력을 중심으로 60% 이상 급증했다.
재생에너지 사업과 관련해 기업들간 합의도 잇따르고 있다. 미국 대형 사모펀드 운용사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는 덴마크 우스테드가 운영하는 영국 해상풍력 단지에 65억달러를 투자하기로 지난달 합의했다. 포르투갈 국영전력회사 EDP는 2030년까지 아시아에서 재생에너니 및 매터리 프로젝트에 최대 2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2026년부터 미국과 유럽에 10.5기가와트(GW) 이상의 에너지 설비 용량을 제공받는 계약을 지난해 브룩필드 리뉴어블 파트너스와 체결하기도 했다. 이 계약은 발표 당시 역대 최대 규모의 기업 간 전력구매계약(PPA)으로 주목을 받았다.
일각에선 AI 거품론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관련주들의 상승세가 과열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S&P 글로벌 청정에너지전환 지수는 2007년 고점 대비 여전히 약 73% 낮고 12개월 선행 기준 주가수익비율(PER)은 약 20배로 5년 평균 23배를 밑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하 기조도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내년에 금리를 2회 추가 인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청정에너지 산업이 자본집약적이고 부채 의존도가 높은 만큼, 금리 하락은 자금 조달 비용을 줄이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블랙록의 에비 햄브로 섹터 투자 총괄은 청정에너지 산업과 관련해 “매그니피센트7(M7)에 밀려 너무 오랫동안 외면받아 왔다"며 “내년에는 우리에게 있어 최우선으로 집중할 영역"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