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 여헌우 기자
식민 지배, 전쟁, 군사독재, 외환위기.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꿰뚫는 핵심 키워드다. 파란만장한 역사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구조를 탄생시켰다. 옥스퍼드사전에도 등재돼 있는 대체불가능한 한국 고유의 단어 '재벌(Chaebol)'이다.
재벌 대기업 중심 경제 발전은 우리나라를 빠르게 선진국 반열에 올리는 데 기여했다. 석유 한 방울 없는 나라가 글로벌 석유화학제품 생산거점으로 거듭났다. 기술·자본 모두 부족했던 삼성은 '반도체 초격차 신화'를 썼다.
국민들도 마음속으로 '한국 기업'을 응원했다. 해외에서 삼성·현대차의 로고를 보면 많은 이들이 묘한 뿌듯함을 느낀다. 100년 넘게 이어진 독립운동정신의 연장선인 듯하다.
외국계 자본이 우리 기업 지분을 사들이면 이를 '공격'이라고 표현한다. 정부는 대기업 총수를 '동일인'이라고 지정하며 별도로 관리한다. 글로벌 스탠다드 관점에서는 어느 하나 평범한 게 없다.
문제는 어느 순간 재계가 '한국의 특수성'과 '재벌 특혜'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뜨거운 감자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란 사례가 대표적이다.
재계는 해당 상법 개정에 반대하며 “경영권 방어 수단이 사라진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사주는 주주 전체의 돈으로 사들인 '회사의 자산'이다.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이를 소각하는 게 전세계 자본시장의 상식이다. 특정 총수 개인의 지배력 유지를 위해 이를 우호 세력과 맞교환하는 행위는 배임이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회사 돈으로 본인 경영권을 지킨다는 생각 자체를 했다는 게 놀랍다.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꽃놀이패'로 활용하는 관행은 재계의 도덕적 권위를 스스로 갉아먹는 행위다.
기업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주주 권익을 침해하면서 노동계·정치권을 향해 “법과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계가 노동조합법 제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 등에 반대할 때 내세운 명분도 '글로벌 기준'이 아니었나?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고집하는 것은 재계가 '기득권 지키기'에 스스로 매몰돼 있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명분이 무너지면 시장, 주주, 국민 모두 기업의 편에 서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