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혁신기업] 고려아연, 50년 ‘제련 제국’ 넘어 ‘글로벌 그린·안보 거인’ 도약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6.02.11 13:00

104분기 연속 흑자 ‘절정의 순간’에 감행한 ‘창조적 파괴’
‘美 국방부 픽’ 울산 제련소…中 장악 공급망 ‘유일한 대안
쓰레기서 금맥 캐는 ‘도시 광산’과 굴뚝 없는 ‘그린 제련소’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사진=연합뉴스

울산 온산 국가산업단지는 지난 반세기 동안 꺼지지 않는 용광로처럼 대한민국 산업화를 지탱해 온 심장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투박한 산업인 제련의 정점에 선 고려아연이 이 곳에서 스스로 껍질을 깨고 있다.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이라는 화려한 성적표 뒤에는 '지금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생존 본능과 치밀한 미래 전략이 숨쉬고 있다.


◇생존의 역설…“가장 좋을 때, 가장 독하게 바꾼다"


기업 경영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잘 나갈 때'다. 승리에 도취해 변화를 멈추는 순간 도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고려아연의 행보는 경영학 교과서에 실릴 법한 '창조적 파괴'의 전형이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 16조5851억 원, 영업이익 1조2324억 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영업이익이 무려 70.4%나 폭증한 수치다. 더 놀라운 것은 2000년 이후 단 한 번의 적자도 없이 이어온 '104분기 연속 흑자'의 대기록이다. 전통 굴뚝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통념을 비웃듯 고려아연은 헤마타이트 공법 등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압도적인 '초격차'를 증명했다.


하지만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이 달콤한 과실에 안주하지 않고 막대한 리스크를 동반한 신사업 '트로이카 드라이브(Troika Drive)'에 회사의 명운을 걸었다. 2차전지 소재·자원 순환·신재생에너지 등 3대 축은 기존 제련업과는 결이 다른 도전이다.



내부에서조차 “왜 잘하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경영진의 판단은 확고했다. 탄소중립과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제련업 하나만으로는 '50년 뒤'를 장담할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현재의 완벽한 1등에 만족하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 스스로 '안전한 항구'를 떠난 것이다.


◇안보의 격상…美 펜타곤은 왜 울산의 제련소를 찾았나


고려아연 이미지

▲고려아연 기업 이미지. 사진=고려아연 공식 유튜브 채널

이러한 고려아연의 변신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맞물려 예상치 못한 가치를 만들어냈다.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며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 건설 중인 11조 원 규모의 통합 제련소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고려아연은 한·미 안보 동맹의 '전략자산'으로 급부상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이례적으로 미국 전쟁부(DoD)와 상무부(DoC)가 전략적 파트너로 참여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이 이를 두고 “미국의 승리"라고 치켜세운 배경에는 '공급망 안보'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현대전의 승패를 좌우하는 미사일·야간 투시경·전투기 레이더에는 안티모니·갈륨·게르마늄 같은 희소금속이 필수다. 문제는 이들 광물의 공급망을 중국이 90% 이상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 이를 무기화할 경우 미국 중심의 서방진영 방위산업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을 대체해 이들 핵심광물을 안정적이고 친환경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기업은 전 세계에서 고려아연이 유일하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고려아연의 테네시 제련소는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자유진영의 경제·안보를 지키는 '병참 기'인 셈이다.


◇업(業)의 재정의…땅이 아닌 도시를 파는 '순환의 연금술'


고려아연의 미래 전략 '트로이카 드라이브'의 구조도. 정리=에너지경제신문

▲고려아연의 미래 전략 '트로이카 드라이브'의 구조도. 정리=에너지경제신문

고려아연 혁신의 또 다른 축은 '채굴(Mining)'의 개념을 다시 쓰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제련이 땅속 깊은 곳에서 광석을 캐내는 것이었다면, 고려아연의 미래는 도시의 폐기물 속에서 자원을 캐내는 '도시 광산(Urban Mining)'에 있다.


2022년 인수한 미국의 전자폐기물 리사이클링 기업 '이그니오(Igneo)'는 이 비전의 핵심 퍼즐이다. 이그니오가 미국 전역에서 수거한 폐 전자 제품을 1차 가공해 한국으로 보내면 온산 제련소는 여기서 구리와 금·은을 뽑아낸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된 100% 재활용 구리는 다시 자회사 케이잼(KZAM)으로 보내져 전기차 배터리용 동박으로 재탄생한다.


'수거(미국)→제련(한국)→소재화(글로벌)'로 이어지는 이 밸류 체인 시스템은 자원 빈국인 한국이 자원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땅을 파헤치지 않고도 쓰레기를 자원으로 되살리는 이 '순환의 연금술'은 탄소 국경세 등 날로 높아지는 환경 규제 장벽을 넘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미래의 책임…굴뚝 산업 '원죄'를 씻는 '그린 & 스마트' 혁명


마지막으로 고려아연은 제련업의 태생적 한계인 '환경 오염'과 '탄소 배출'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호주 자회사 아크 에너지(Ark Energy)를 통해 풍력과 태양광 단지를 개발하고, 여기서 얻은 전기로 물을 분해해 '그린 수소'를 생산하는 프로젝트는 그야말로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었지만 고려아연은 이를 통해 '화석 연료 없는 제련소'라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제련소 내부의 풍경도 바뀌었다. 숙련공의 감각에 의존하던 공정은 스마트 팩토리로 진화 중이고, 수없이 많은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흐른다. 위험한 현장에는 안전모를 쓴 작업자들 사이로 4족 보행 로봇 '스팟(Spot)'이 투입돼 쉴 새 없이 설비를 점검하고 수만 개의 센서가 0.01%의 불순물도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이는 더럽고 위험한 산업을 인공지능(AI)와 빅데이터 기반의 가장 깨끗하고 안전한 첨단 환경산업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고려아연의 확고한 ESG경영 산물이다.



박규빈 기자 기사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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