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호 한국전기연구원 미래전략실장
▲손성호 한국전기연구원 미래전략실장
유럽연합(EU)의 배터리 규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국내 이차전지 기업들의 대응도 빨라지고 있다. 탄소발자국 산정, 배터리 여권 도입, 재활용 의무 강화 등의 요구사항들은 산업 전반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많은 이들이 이를 환경 규제의 하나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단순한 규제를 넘어선다. 이는 중국 중심의 배터리 공급망을 흔들며, 산업의 경쟁 방식을 재설정하는 새로운 게임의 룰에 가깝다.
EU 배터리 규정의 핵심은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을 정량화하고, 이를 제품 경쟁력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겠다는 데에 있다. 이는 곧 배터리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어떠한 전기를 사용해 생산했는지도 중요해진다는 의미가 된다.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높은 국가에서 생산된 배터리가 상대적으로 유리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즉, 배터리 제조업이 독립적인 산업에서 전력시스템과 긴밀하게 연결된 산업으로 재편되는 것이다.
또한, 배터리 여권제도는 원재료의 채굴부터 생산, 사용, 재활용에 이르는 전 과정의 데이터를 투명하게 관리하도록 요구한다. 이는 공급망 전반의 구조를 재편하는 동시에, 데이터 기반의 산업 경쟁을 촉진할 수 있다. 재활용 의무 역시 단순한 환경 보호를 넘어, 자원 확보 전략과 직결될 수 있다. 결국 EU는 배터리를 중심으로 에너지, 자원, 그리고 데이터가 결합된 새로운 산업 질서를 설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전력 시스템 측면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전력망의 변동성과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에너지저장장치(ESS)다. 이제 ESS는 단순한 배터리 응용 제품이 아니라, 전력망의 유연성을 높이고 수급 불균형을 완화해 안정성을 유지하는 핵심 인프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계통 안정성 확보를 위한 ESS는 재생에너지 확대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 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와 함께 ESS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AI 확산에 따른 데이터센터 증가는 ESS 수요를 추가로 견인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이차전지 산업은 여전히 전기차용 배터리 중심 전략에 머물러 있다. 물론, 전기차 시장은 여전히 중요한 성장 동력이지만, 전력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ESS 분야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전략적 강화가 필요하다. 특히 전력망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극한 기상 환경이나 수요 급변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신뢰성 및 장수명의 ESS 기술 개발과 계통 연계형 제품 경쟁력이 필수적이다.
기술 축적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이차전지 산업은 분명한 강점을 갖고 있다. 높은 수준의 제조 기술과 품질 경쟁력을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또한, EU의 동등 원산지 자동 인정 규정을 통한 규제 불확실성 해소는 한국 배터리 기업들에게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몇 가지 약점도 드러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탄소집약적 전력 구조, 해외 원재료 의존도, 그리고 규제 대응을 위한 시스템적 준비 부족 등이다.
앞으로는 어떤 조건에서 만들어지는지가 배터리 제품의 선택에 더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따라서 대응 전략 역시 달라질 필요가 있다. 첫째, 저탄소 전력을 기반으로 한 생산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둘째, 재활용과 순환경제를 포함한 소재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셋째, 배터리 여권에 대응할 수 있는 데이터 관리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이는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전력 정책과 산업 정책의 연계된 접근이 필요하다.
배터리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저장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에너지 시스템과 산업 구조, 그리고 글로벌 규범 등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 전략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EU 배터리 규정은 그 교차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변화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여 따라가지 못한다면, 기술 경쟁력만으로는 앞으로의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이제 경쟁력은 기술을 넘어 규정에 대응하고 시스템을 설계하는 능력에서 결정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