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개국 더운 계절 출산 3660만 건 분석
폭염은 진통을 촉발하는 ‘방아쇠’ 역할
저소득층·미혼모, 여아 임신 때 더 취약
서울에서 비슷한 연구 결과 발표되기도
냉방시설 접근 지원하는 보건 체계 필요
▲(자료=챗GPT 이미지)
기후위기로 인한 기록적 폭염이 임산부와 태아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대규모 국제 연구 결과가 나왔다.
특히 폭염은 단순한 여름철 불쾌감을 넘어 조산(早産, preterm birth)을 유발하는 환경 요인으로 작용하며,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산모일수록 위험이 더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산은 임신 20주를 지나 임신 37주(36주 6일) 이전에 분만하는 것을 말한다.
스페인 발렌시아 대학과 스위스 베른 대학 등 국제연구팀은 최근 국제학술지 '국제 환경(Environment International)'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전 세계 13개국 250개 지역의 출생 자료 약 8600만 건 가운데 따뜻한 계절에 출생 자료 3660만 건을 분석했다.
한국은 연구 대상 13개국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국내 연구진이 2019년에 발표한 논문도 비슷한 분석 결과를 제시한 바 있다.
◇폭염일수록 조산 위험 높아졌다
연구 대상 국가는 호주·브라질·캐나다·칠레·에콰도르·에스토니아·이스라엘·이탈리아·일본·파라과이·스페인·스위스·미국이었다.
연구진은 폭염 노출 뒤 4일 이내 조산 위험 변화를 분석했다.
그 결과 따뜻한 계절에 발생한 조산의 약 1.41%가 폭염 탓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는 출생 100만 건당 약 855건의 조산이 폭염 때문에 발생한다는 의미다. 국가별로는 스위스가 100만 명당 628건으로 가장 낮았고, 파라과이는 1347건으로 가장 높았다.
폭염 강도가 높아질수록 조산 위험도 커졌다. 연구진은 평균적으로 따뜻한 계절 기준 75퍼센타일(전체 더위 가운데 상위 25% 안에 드는 더운 날) 수준의 '중간 강도 폭염'에서는 조산 위험이 2.80% 증가했다. 95퍼센타일(전체 더위 가운데 가장 심한 상위 5% 수준의 극심한 폭염) 수준의 '극한 폭염'에서는 위험이 3.80% 증가했다고 밝혔다.
특히 폭염 발생 직후 0~1일 사이에 위험 증가가 가장 컸다.
◇“폭염은 진통을 촉발하는 방아쇠"
연구진은 폭염이 단지 극단적인 미숙아 출산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임신 후기 전체에서 진통을 촉발하는 '방아쇠(trigger)'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연구 결과 임신 31~40주 사이가 폭염에 가장 민감한 시기로 나타났다. 후기 조산(late preterm birth) 위험은 중간 강도 폭염에서 2.21%, 극한 폭염에서 3.84% 증가했다.
흥미로운 것은 정상 출산 범주에서도 영향이 확인됐다는 점이다. 임신 37~38주의 조기 만삭 출산(early at-term birth)과 39주 이상 만삭 출산(full at-term birth)에서도 폭염 노출 시 출산 위험이 증가했다. 이는 폭염이 임신 주수와 관계없이 분만 자체를 앞당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폭염이 임산부 몸속에서 다양한 생리학적 스트레스를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고온은 체내 염증 반응(inflammation), 산화 스트레스(oxidative stress), 혈관 수축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런 반응은 태반 기능을 손상시키고 자궁 내 성장 환경을 악화시키며 조기 진통을 촉진할 가능성이 있다.
또 임신 중에는 태아 성장으로 체내 열 생산은 증가하지만 체중 증가로 열 발산은 어려워진다. 여기에 탈수와 혈액 점도 증가, 자궁 혈류 감소 등이 겹치면 태아와 태반에 부담이 커지면서 조산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
동물실험에서는 열 스트레스가 내분비계와 호르몬 균형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자궁 수축을 촉진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젊은 산모·저소득층이 더 취약
폭염의 영향은 모든 임산부에게 동일하지 않았다.
연구진은 젊은 산모, 교육 수준이 낮은 산모, 저소득층, 미혼모, 그리고 여아를 임신한 경우 폭염에 더 취약한 경향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산모일수록 도시 열섬 현상이 심한 지역에 거주하거나 냉방 접근성이 낮고, 다른 환경 스트레스에 동시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연구진은 분석했다.
도시 열섬(heat island) 현상은 건물과 아스팔트가 많은 도심에서 낮 동안 열을 흡수했다가 밤에도 열을 내뿜으면서 도시 외곽 지역보다 기온이 더 높아지는 현상이다.
연구진은 대륙성 기후 지역에서 위험이 더 컸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캐나다와 에스토니아에서는 극한 폭염 시 조산 위험이 상대적으로 크게 증가했지만, 브라질이나 에콰도르 같은 열대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연관성이 관찰됐다. 이는 평소 더위에 대한 적응 수준과 냉방 인프라 차이 때문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서울 연구도 “폭염이 조산 증가" 확인
한국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확인됐다. 지난 2019년 고려대 이종태 교수와 미국 예일대 손지영 연구원 등은 국제 저널인 '환경 연구(Environmental Research)'에 관련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논문에서 연구팀은 2004~2012년 서울 단태아 출생 81만3820건을 분석했다. 그 결과 임신 전 기간, 출산 전 4주, 출산 전 1주 동안에 열지수(heat index)가 상승하면 모두 조산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임신 기간 전체에서 열지수가 약 5.5℃ 상승할 경우 조산 위험은 최대 3.3% 증가했다.
열지수는 기온과 습도를 함께 계산해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더위를 나타내는 지표다. 단순 기온이 같은 33℃라도 습도가 높으면 땀이 잘 증발하지 않아 몸이 더 덥게 느껴지는데, 이를 반영한 수치가 열지수다. 따라서 열지수는 단순 기온보다 폭염이 인체에 미치는 부담을 더 잘 보여준다.
서울 연구에서는 젊은 산모와 고령 산모 모두 폭염에 취약했다. 25세 미만 산모는 폭염 노출 시 조산 위험이 1.187배로 가장 높았고, 35세 이상 산모 역시 위험 증가가 확인됐다.
또 저학력 산모가 사회경제 수준이 낮은 지역에 거주할 경우 위험은 더욱 커졌다.
◇“폭염 대응이 곧 태아 건강 정책"
연구진은 특히 기후변화가 심화될수록 폭염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해 미래 세대 건강 부담 역시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폭염은 이제 단순한 계절 재난이 아니라, 태아의 생존과 건강까지 위협하는 새로운 공중보건 위험으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기후위기 시대에 임산부 보호 대책을 폭염 정책의 핵심 축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폭염특보 발령 시 임산부에게 즉각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냉방시설 접근을 지원하는 공공 보건 체계가 필요하다. 도시 열섬 현상이 심한 저소득 지역에 대한 냉방 지원과 녹지 확대도 중요하다.
의료기관은 임신 후기 산모를 대상으로 폭염 행동수칙을 적극 안내해야 하며, 충분한 수분 섭취와 외부 활동 제한, 적정 실내 온도 유지 등을 권고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