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부진 진상 규명·방치 현장…배상 청구 시효 임박
보잉 책임론 맹점…옅어지는 관계 당국·항공사 과실
美 재판 관할권 각하 가능성…유가족, 세 갈래 나뉘어
도 넘은 악의적 허위 비방에도 깊은 고심 끝 처벌 불원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2216편 참사 수습 현장. 사진=연합뉴스
179명의 목숨을 앗아간 2024년 12월 29일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2216편 추락 참사 발생 이후 1년 8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국가 주도 진상 규명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12·29 여객기 참사 특별수사단을 꾸린 경찰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현재까지 34명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특히 행정 당국이 행정 편의를 위해 희생자 179명을 일괄적으로 '동시 사망'으로 처리해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일부 유족들이 법적 상속 절차에 따른 공제 혜택조차 받지 못한 채 막대한 상속세 폭탄까지 떠안게 된 상황은 국가 시스템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사법적 진실 규명의 짐을 짊어진 유가족들은 단일대오를 유지하지 못한 채 책임 소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소송전이 세 갈래로 분화되는 각자도생의 형국을 띠고 있다.
◇ “빠른 조사 아닌 바른 조사"
진상 규명이 표류하는 가운데 지난 6일 무안공항에서는 참사 발생 1년 8개월 만에 최기영 신임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장과 유가족 협의회 간의 첫 간담회가 열렸다.
유가족 측은 신임 위원장에게 △마지막 4분 7초 기록이 중단된 조종실 음성 기록 장치(CVR)와 비행 데이터 기록 장치(FDR) 등 모든 원본 데이터의 투명한 즉시 공개 △해외 전문가 조사의 권한과 역량 검증이 포함된 사고 조사 종합 계획과 로드맵 수립 △정례 간담회를 통한 알 권리 보장 및 조사 과정 참여 제도화 △확인된 위험 요소에 대한 선제적 긴급 안전 권고 즉각 수립 등 4가지를 촉구했다.
밀실 조사와 편파 조사 논란을 불식시키고 조류 충돌부터 불법 둔덕 충돌, 관할 당국의 항공 안전 관리 문제, 제주항공의 정비·교육 결함 여부까지 성역 없이 밝혀달라는 게 이들의 요구 사항이다.
국가의 조사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73명의 유가족은 투명한 심사 절차를 거쳐 '법무법인 원'을 대리인으로 선정하고, 정부·항공사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소송이라는 가시밭길을 택했다.
이들 앞에 놓인 가장 큰 장벽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국제 항공 운송 중 발생한 사고 배상 책임을 규정한 몬트리올 협약에 따르면 소멸 시효는 항공기 도착 예정일로부터 정확히 2년으로 제한된다. 권리 소멸을 막기 위해 유가족들은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오는 12월 28일 자정 이전에는 반드시 법원에 본안 소장을 제출해야만 한다.
시간이 촉박해지는 가운데 법무법인 원은 지난 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에 사고 현장의 폐쇄 회로(CC) TV 영상과 수습된 유류품 등에 대한 증거 보전 신청서를 제출했다. 참사 이후 2년이 돼가도록 사고 여객기 파편이 허허벌판에 방치된 데다 조사 당국이 사고 현장을 제대로 보존하지 않고 훼손한 정황마저 파악돼 민사 재판 개시 전 법원의 강제력을 빌려 선제적으로 증거를 동결하려는 소송 전략이다. 이와 함께 전직 국토부 장관 등을 중대재해처벌법상 중대시민재해 혐의로 고소하며 수사 기관을 압박하고 있다.
이와 관련,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2216편 참사의 원인을 미국 제조사 보잉의 기체 결함으로 좁혀가는 사조위의 조사 논점이 결과적으로 미국 내 항공 소송 전문 로펌들에게 유리한 법률적 근거를 제공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조위가 기초 동역학 한계와 배치되는 '16G(중력가속도) 좌석 안전 규정 미달' 가능성을 부각함에 따라 미국 법원에서 제조사를 상대로 막대한 배상금을 청구한 원고 측 대리인들의 소송 전략에 힘이 실리고 있다. 반면 참사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되는 관할 당국의 콘크리트 둔덕 방치와 항공사의 운항 책임은 상대적으로 소송의 쟁점에서 멀어지는 양상이다.
◇ “조류 충돌이 설계 결함 탓"…사조위 회의록 인용한 소송 전략
▲허만 로 그룹 찰스 허만 변호사. 사진=박규빈 기자
이들 대리인단은 사고의 모든 본질을 '보잉의 총체적 시스템 실패'로 규정하고 있다. 찰스 허만(Charles Herrmann) 변호사는 지난해 10월 16일 서울에서 연 기자 회견에서 “기자 여러분이 쓰는 휴대폰과 비교해 보라. 보잉은 66년 전인 1958년에 설계된 전기·유압 시스템 아키텍처를 그대로 쓰고 있다"며 '낡은 시스템의 위험성'을 언급하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는 조류 충돌 후 벌어진 상황에 대해 “엔진 고장으로 시작해 FDR·CVR이 멈췄고 랜딩 기어와 역추진 장치 등 15가지 안전 시스템이 연쇄 붕괴했다"며 “조종사들은 기댔어야 할 시스템을 강탈당했고 이들의 과실은 보잉에 비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보잉이 맥도넬 더글러스를 인수한 후 스톤 사이퍼 당시 최고경영자(CEO)가 “더 이상 엔지니어링 회사가 아닌 이윤을 원한다"며 본사를 시카고로 옮긴 점을 거론하며, 이를 보잉의 중과실이라고 공격했다.
이와 같은 책임 전가 상황에서 최근 언론을 통해 유출된 사조위의 '16G 좌석 규정 미달' 정황은 원고 측의 징벌적 손해배상 논거를 한층 더 강화할 핵심 무기로 활용될 전망이다. 앞서 국내 협력 대리인인 하종선 변호사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좌석 비산이 사실로 입증될 경우 사망자를 늘리는 결정적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낡은 설계' 비난의 모순…66년 간 검증된 베스트 셀러의 신뢰성
▲인천국제공항 에어 사이드에 주기된 제주항공 B737-800(HL8321). 사진=박규빈 기자
그러나 항공업계와 공학 전문가들은 허만 변호사의 “66년 전 낡은 설계"라는 주장에 논리적 모순이 있다고 반박한다. 보잉 737 시리즈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해당 전기·유압 시스템 아키텍처의 기본 골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시스템이 전 세계 민간 항공 역사상 가장 많은 비행 횟수와 수천만 시간의 운항을 통해 안전성이 검증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기종이기 때문이다.
항공 공학계에서 새로운 설계로의 무리한 전환은 오히려 예측 불가능한 버그를 낳을 수 있어 장기간 신뢰성(Proven Reliability)이 입증된 시스템을 개선해 사용하는 것이 글로벌 표준이다. 사고기인 보잉 737-800 역시 가장 안전한 기종 중 하나로 꼽힌다. 이를 중과실로 몰아가는 것은 법정 여론전을 위한 선동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국제 항공 사고 조사 기구 요직을 지낸 업계 관계자 A씨는 사조위의 보잉 책임론 유출 시점에 대해 “이 시기에 섣부르게 보도된 것을 보면 무언가 구린내가 난다"며 “보잉을 상대로 재판을 걸 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노려 유가족 측이나 법률 대리인들에게 청탁을 받고 쓴 기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A씨의 이 같은 의견은 국가 주도의 사고 조사 데이터가 사고 예방과 객관적인 진상 규명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상실한 채 거액의 징벌적 배상금을 노린 기획 소송 세력의 유리한 논거로 오용되거나 편향되고 있다는 공학계의 짙은 우려를 대변한다.
◇ 美 판례 '불편한 법정의 원칙' 우회용…관할권 심리가 변수
허만 로펌 등 항공 사고 전문 대리인단은 과거 대한항공 007편 피격 사건·인도네시아 라이온에어 610편 추락 사고 등에서 대규모 배상 합의를 이끌어낸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들 전문 로펌의 전략은 장기적인 배심원 평결에 도달하기 직전에 연대 및 개별 책임(Joint and Several Liability)' 원칙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거대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와 언론 노출 리스크를 부각해 거액의 합의를 유도하는 방식에 집중된다.
허만 변호사는 작년 회견에서 “보잉의 과실이 10%만 인정되더라도 100%의 손해 배상액을 청구할 수 있다"며 징벌적 배상 제도가 있는 미국 법정을 고집하는 이유를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유가족 대리인들이 '66년 된 시스템 결함' 등을 끌어들이는 진짜 이유가 미국 손해배상 소송이 절차적 이유로 기각될 가능성을 우회하기 위함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 연방법원은 외국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불편한 법정의 원칙(FNC, Forum Non Conveniens)'을 적용한다. 연방대법원 판례(Piper Aircraft Co. v. Reyno)에 따르면 △사건의 발생 장소 △핵심 증거(공항 인프라) △주요 증인이 모두 미국 외 국가에 소재할 경우 법원은 관할권을 거부하고 원고를 사건 발생국 법원으로 이송할 수 있다.
특히 보잉 측이 방어권 행사의 일환으로 “사고의 실질적 원인 제공자인 국토교통부의 둔덕 방치와 제주항공을 미국 법정에 강제로 피고 합류시킬 수 없어 공정한 재판이 불가능하다"고 항변할 경우 미국 법원이 사건을 심리할 명분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허만 변호사가 기자 회견 당시 “미국 소송과는 별개로 한국 소멸 시효 2년이 지나기 전 제주항공과 무안공항을 상대로 한국에서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힌 것 자체가 정작 근본 원인을 제공한 한국 측 당사자들을 미국 법정에 함께 세우지 못하는 한계를 자인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 美 법원, 소송 기각 심리 일정 확정…신중론 펴는 대리인단
▲미국 워싱턴주 서부 연방지방법원의 '무안 참사 다중지구 소송(Multidistrict Litigation, MDL 3174)' 명령서
찰스 허만 등 일부 로펌이 징벌적 배상을 공언하고 있지만, 관할권 기각 우려는 미국 현지 법정에서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본지가 입수한 미국 워싱턴주 서부 연방지방법원의 '무안 참사 다중지구 소송(Multidistrict Litigation, MDL 3174)' 명령서에 따르면 제임스 L. 로버트 판사는 보잉 측이 FNC에 근거해 제기할 소송 각하 신청(Motion to Dismiss) 심리 일정을 승인했다.
명령서에 명시된 일정표를 보면 보잉 측은 오는 9월 11일(현지시각) FNC 소송 각하 신청서를 정식 제출하고 양측은 10월 23일까지 서면 공방을 마쳐야 한다. 핵심 증거와 주요 피고가 한국에 있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이 내려지면 배상 심리조차 못한 채 재판이 무산된다.
이러한 기각 리스크에 대해 국내 대리인단 중 일부는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미국 대형 로펌 '크레인들러(Kreindler)'와 제휴 중인 하종선 변호사는 본지 통화에서 “소장을 낸 찰스 허만 변호사 측과는 처음부터 공조하지 않고 별도로 움직이고 있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하 변호사는 “FNC 기각 리스크가 존재해 우리는 아직 소장을 내지 않고 (보잉 측과) 협상 중"이라며 “현재 FNC 관련 증거 개시(Discovery)가 진행 중이며, 빠르면 10월 말이나 11월 중에 판사의 결정이 나올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수사 안 되니 로펌에 의지할 수밖에"…세 갈래로 쪼개진 유가족들
소송 각하 리스크와 불확실성 속에 방치된 유가족들은 대리인단의 성향에 따라 크게 세 그룹으로 흩어졌다.
무안 참사 유가족 B씨는 본지에 “현재 유족들은 국내 소송을 준비하는 '법무법인 원', 찰스 허만 측과 국제 소송을 낸 '서원', 그리고 하 변호사가 제휴한 '크레인들러' 측으로 나뉘어 있다"며 “일부 로펌 역시 FNC 기각을 우려해 관망하는 등 서로 입장이 다 다르다"고 말했다.
B씨는 현재 국면에 대해 “국가 차원의 진상 조사나 수사가 전무하다 보니 진실을 모르는 유족들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로펌들 얘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A씨 역시 이 사건의 책임 규명이 편향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꼬집었다.
그는 “만약 콘크리트 둔덕이 진짜 원인이라면 과거 무안공항보다 4배나 높은 둔덕이 있었던 여수공항에서는 왜 대형 사고가 나지 않았겠느냐"며 “결국 비행기가 왜 그 속도로 거기까지 밀려가게 됐는지, 조종사의 훈련 상태와 운항 승무원 편조의 적절성 같은 제주항공 측의 책임이 우선돼야 한다"고 비판했다.
인프라의 구조적 방치 문제뿐만 아니라 1차적으로 비행기를 통제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위기 상황에 대처했어야 할 조종사들의 대응 등 인적 과실 요인을 최우선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이어 “보잉은 법률적으로 결코 만만한 기업이 아니며, 근본 원인을 외면한 채 사조위의 억지 논리를 무기 삼아 무리한 소송을 걸었다가는 미국 법정에서 기각돼 유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부메랑을 맞게 할 것"이라고 했다.
◇ 2차 가해에 두 번 우는 유족…사법적 단죄와 처벌 불원의 딜레마
이처럼 험난한 소송전 속에서 유가족들은 법정 밖에서도 깊은 상흔에 시달리고 있다. 참사의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와 영상 플랫폼을 중심으로 진상을 규명하려는 유가족 협의회 지도부를 향해 “특정 정당 소속의 가짜 유족이다",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다"는 등의 무자비한 허위 사실이 조직적으로 유포되며 심각한 2차 가해가 가해졌다.
도를 넘은 모욕에 참다못한 유가족들은 광주지방변호사회의 자발적 조력을 받아 '법률지원단'을 꾸리고 대규모 형사 고소로 맞섰다.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 역시 전국 시·도경찰청 전담 수사관들을 투입해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하며 엄정 대응 기조를 밝혔다. 실제로 악의적인 허위 사실을 유포한 30대 남성 악플러 한 명은 정보통신망법 위반·명예 훼손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부산지방법원의 1심 재판부는 이 사건의 공소를 기각했다. 앞서 가해자의 거듭된 사과와 선처 호소에 유족 대표가 고심 끝에 처벌 불원서를 법원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죄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형사 처벌을 할 수 없는 '반의사 불벌죄'에 해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