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상위 10% 시설이 53% 배출
한국 석화 분야 탄소 배출량 세계 3위
플라스틱 협약까지…생산 감축 불가피
▲전남 여수시 석유화학단지. (사진=연합뉴스)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탈탄소 전략이 '생산시설을 모두 친환경 설비로 바꾸는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분석이 나왔다. 중국발 공급과잉과 수익성 악화로 진행 중인 국내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을 탄소 배출을 감축하는 계기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영국 셰필드대학 연구진은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 지속가능성(Nature Sustainability)'에 '글로벌 석유화학 생산의 배출량과 시스템 차원의 탈탄소 경로'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진은 전 세계 3만7379개 석유화학 생산시설과 81개 화학제품, 2043개 제조공정을 분석했다.
연구에 따르면 2020년 세계 석유화학산업의 전 과정 배출량은 이산화탄소(CO₂) 기준으로 약 18억톤이었고, 1위 중국이 6억6000만 톤으로 37%를 차지했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석유화학 생산 배출량 세계 3위권으로 분석된다.
전 세계 석유화학 산업 시설의 상위 10%가 전체 배출량의 53%를 차지했다. 모든 공장을 똑같이 감축하기보다 배출량이 많은 시설부터 손대는 것이 효율적인 이유다.
◇구조조정 자체가 '배출 감축' 기회
셰필드대학 논문은 국내 석유화학업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국에서는 이미 공급과잉에 따른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지난해 270만~370만 톤 규모의 나프타 분해시설(NCC) 감축에 합의했고, 현재 가시화된 대산·여수 1호 프로젝트의 감축량은 249만 톤 규모다. 대산에서는 통합법인이 앞으로 3년간 110만 톤의 NCC 가동을 중단할 계획이다.
이는 산업 경쟁력뿐 아니라 탄소배출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화다. 노후하고 효율이 낮은 설비를 폐쇄하고 상대적으로 효율이 높은 설비에 생산을 집중하면 설비 감축과 에너지 효율 개선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다만 국내 생산 감소가 곧바로 세계 탄소배출 감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내에서 줄어든 생산이 중국이나 중동 등 다른 지역으로 이전된다면 '배출량의 이동'에 그칠 수 있다.
◇전력화는 전력망이 깨끗해진 뒤
석유화학 공정의 전기화도 온실가스 감축의 핵심 수단이다. 그러나 전력망이 화석연료 중심인 상태에서 전기화를 서두르면 오히려 배출량이 늘어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전환이 쉬운 저·중온 공정부터 전기화를 추진하고, 막대한 고온 열이 필요한 에틸렌 스팀크래킹 등은 전력망의 탈탄소화 속도에 맞춰 단계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특히 석유화학단지는 여러 공정이 열과 부산물을 공유하는 거대한 통합 시스템이어서 단순히 연료를 전기로 바꾸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전면적인 전기화는 기존 열병합발전과 부산물 활용 체계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문제까지 동반한다.
연구팀이 언급한 탄소 흡수 저장(CCS)은 한국 석유화학산업이 적극 검토할 만하다. 특히 울산 등 대규모 석유화학단지에서 여러 기업의 CO₂를 모아 파이프라인이나 선박으로 운송하고 동해 가스전 등 저장소에 주입하는 산업단지 공동 CCS 모델은 개별 기업이 단독으로 추진하는 것보다 현실성이 높다.
다만 CCS가 만능 해법은 아니다. 연구진은 공정 배출 CO₂의 이론적 포집률을 최대 약 90%로 제시하지만, 저장 부지와 운송 인프라가 필요하고 모든 CO₂를 저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요소 생산처럼 포집한 CO₂가 제품 생산에 다시 사용되는 공정도 있다.
▲충남 대산 석유화학 산업단지에 위치한 롯데케미칼 대산공장 전경. (사진=롯데케미칼)
◇바이오 원료도 '100% 전환'은 답이 아니다
바이오 원료 역시 보조 수단에 가깝다. 석유 원료를 바이오매스로 바꾸면 원료 단계의 배출을 낮출 수 있지만, 대규모 바이오 원료 생산에는 토지·물·생물다양성·식량과의 경쟁 문제가 따른다. 제품을 폐기하면서 소각하면 바이오매스에 저장됐던 탄소가 다시 대기로 배출될 수도 있다.
이같은 셰필드대학 연구팀의 전망을 고려한다면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탈탄소 전략은 단순히 '같은 양을 더 깨끗하게 만드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전력망 탈탄소화 △고효율 설비 중심의 구조조정 △전기화 △공동 CCS △선별적 바이오 원료 전환 등 다양한 방법을 조합하는 것도 방법이다.
여기에 하나의 변수가 더 있다. 바로 플라스틱 국제협약이다. 아직 플라스틱 생산량 자체를 얼마나 줄일 것인지에 대한 국제적 합의가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향후 협약이 원료 생산과 일회용 플라스틱, 재활용 등을 규제하는 방향으로 강화된다면 석유화학제품 수요 자체가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고배출 설비는 과감히 줄이고, 남는 생산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탈탄소화하면서, 동시에 플라스틱 수요와 원료 구조의 변화까지 준비하는 것이 한국 석유화학산업이 살아남으면서 탄소도 줄이는 길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