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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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 발표, 새로운 미래를 여는 정부
6월 4일, 정부는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을 심의‧확정했다. 에너지기본계획은 5년마다 수립되는 ‘에너지 헌법’으로 불리는 에너지 분야의 최상위 법정계획이다. 이번 계획에는 2040년까지의 우리의 에너지 미래 방향과 추진 전략이 담겨있다. 특히,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계획의 전면에 두고 ‘에너지 전환을 통한 지속가능한 성장과 국민 삶의 제고’라는 비전을 수립하였다. 기후 변화가 기후 위기로 보다 진중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지속가능성’을 에너지기본계획에 명시한 점은 적절한 조치라 볼 수 있다.
‘소비’, ‘생산’, ‘시스템’, ‘산업’, ‘기반’이라는 5대 중점 과제에서 특히 ‘소비’ 영역의 계획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급중심의 에너지 다소비형 체제를 소비구조 혁신을 통해 선진국형 고효율‧저소비형 구조로 전환하겠다”라는 선명한 선언적 목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존 에너지 패러다임이 “경제 성장을 위해, 에너지 공급체계를 성장 속도에 발맞춰 지원한다”이었다면, 이제는 “지속가능성을 위해, 에너지 소비구조를 개혁하고 새로운 가치와 성장동력을 얻겠다”로 바뀐 사실을 목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4차 산업혁명 기술로 표현되는 신기술도 필요하나 에너지 가격체계의 지속적 합리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에너지기본계획에서는 주택용 계시별 요금제, 녹색요금제, 수요관리형 요금제 등을 도입하겠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IT기술을 활용하여 소비자의 불편은 낮추고, 전기소비의 조절로도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에너지 신산업을 육성‧확산시키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과 개혁방안은 5년 전 수립된 <제2차 에너지 기본계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차 계획에는 “낮은 전기요금으로 전력 소비 효율향상과 에너지 절약 관련 기술에 대한 투자유인이 미진하였으나, 향후에는 수요관리정책으로 진작시킨다”라고 명시하여 에너지 소비구조 개혁을 위해서는 낮은 전기요금을 합리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문제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2차와 3차 계획에 담긴 에너지 소비구조 개혁의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지금의 전기 생산, 소비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공급확장 일변도의 전력산업 구조는 공급-소비의 균형을 고려해 개편되어야 한다. 에너지 가격체계를 개혁하고 소비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인하여 새롭게 창출되는 가치‧수익을 공유하는 지속가능하고 새로운 고부가가치 전력산업을 만들겠다.”
2.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 지금 당장 비만 피하려는 정부
6월 3일, 에너지기본계획이 확정되기 하루 전날 누진제 개편(안)이 제시되었다. (1안)하계 누진구간 확대, (2안)하계 누진단계 축소, (3안) 누진제 폐지 등 총 3개의 개편(안)이 제시되었다. 제시된 개편(안)은 방법론에 차이가 있으나 결과적으로 전력 다소비 소비자의 부담을 낮추겠다는 데 있다.
전기요금 누진제는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국가에서 에너지 다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1974년 도입되었으며 전기 사용량이 많을수록 적용되는 요금단가도 함께 올라가는 징벌적 요금제이다. 일반 소비자, 즉 주택용에 한정하여 적용되었고 산업용 요금제는 경제 성장 논리로 적용되지 않았기에 다수의 불만이 누적되어 왔다. 에너지다소비형 산업구조 및 소비자 간 요금 부담의 불균형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적된 문제이기도 하다. 작년에는 폭염으로 전기요금 상승이 예상되자 누진제를 7~8월 한시적으로 완화했지만 지속되는 소비자 불만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작년 12월부터 관련 민관 TF(태스크포스) 검토를 하였고 지난 3일 개편(안)을 확정하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다가오는 여름, 예상되는 폭염을 대비한 고육지책으로 해석된다. 전기요금의 상승이 국민 다수의 불만으로 바뀔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문제는 이러한 조치는 ‘에너지 전환’과 완벽히 대치된다는 사실에 있다.
폭염은 팽창하는 대규모 에너지설비와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에너지 소비가 야기한 기후변화의 결과이다. 인간의 반(反)환경적인 활동으로 뜨거워지는 지구의 온도를 최대한 억제하겠다는 미션이 지난 파리 기후변화협약에 담겨있다. 효율적인 에너지 소비는 “가장 깨끗한 에너지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철학의 발로이다. 소수의 환경운동가가 불편함을 감수하며 실험해왔던 일련의 에너지 소비 억제 활동을 새로운 IT기술을 활용하여 불편함을 낮추고, 그 효과는 높이는 게 수요관리이자 에너지효율로 대표되는 에너지신산업이다.
단순히 요금을 낮추는 정책은 완벽히 에너지 전환과 반대된다. “전기를 마음껏 써도, 전기요금은 오히려 내려간다”라는 요금 인하 정책은 자라나는 아이가 울자 막대사탕을 손에 쥐여 주는 행위와 별 차이가 없다. 소비자는 전기를 많이 쓰고 돈은 적게 내서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에너지기본계획이 이야기하는 에너지 소비구조 개혁은 어디로 실종된 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3. 숙의민주주의, 시민이 함께 만드는 에너지 정책
사실, 전기요금은 가급적 아무도 모르게 올려왔다. 날씨도 온화하고 연휴로 들뜬 시민과 언론들이 관심을 적게 가질 추석연휴 직전이 전기요금 인상의 적기라는 농담이 전력산업계에서는 상식으로 통용되어 왔다. 공과금의 인상을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유독 전력산업에는 가혹한 기준으로 적용되어 왔다. 가스, 기름 가격의 인상은 ‘유가 상승’에 따른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그 불만이 크지 않지만 유독 ‘저렴한 전기’라는 인식은 정부와 시민 모두가 집착하는 이슈가 되어 버렸다.
다수의 언론에서 주택용 누진제 완화로 인한 한전 적자 심화를 걱정하며 우려의 목소리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 요금이 올라가면 더욱 거세게 정부를 비난한다. ‘경제가 어려운데, 전기요금 인상에 앞장서는 정부’, ‘방만 경영의 대표 공기업 한전, 기업구조 개선 없이 손쉬운 전기요금 인상’ 등 언론의 거센 비판은 오래전부터 반복되는 현상이다. 언론은 비판하고, 여론몰이 현상이 선명해진다. 또한 폭염이 오면, 효율적 소비를 유인하는 ‘에너지 전환’ 정책 근간을 물어뜯는 일부 언론의 비판과 여론의 결집 역시 대응하기 쉽지 않은 부담이다.
‘에너지 전환’은 정부 집권 기간 완수되는 단기 목표가 아니라 수십 년 동안의 지속을 통해, 에너지 생산‧소비 체계의 틀이 근원적으로 변화하는 장기 비전이다. 에너지 전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책의 ‘지속가능성’이다. 지속가능한 성장과 삶을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정책과 국민적 지지가 필요하다.
에너지 문제는 더 이상 국가가 소수의 전문가와 협의하여 결정하는 국가주의 방식에 한정되지 않는다. 물론, 에너지 정책에 다수 시민을 대표하는 교수, 소비자단체, 연구자로 구성된 민간의 참여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국민의 참여라 말하기는 어렵다.
현재의 ‘에너지 전환’이 과거와 가장 큰 차이를 가지는 부분은 다수 시민의 참여가 가능해진 점이다. 분산형 태양광과 프로슈머(prosumer), 수요반응과 가상발전소(VPP) 등은 정부와 소수의 전력공급자가 알아서 책임지던 전력산업이 분권화, 다양화되어 다수의 참여가 실현된 새로운 전력산업의 상징과 같다. 따라서 에너지 정책에 시민이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지난 2017년, 신고리 5‧6호기를 둘러싼 탈원전 논의와 공론화 과정에 시도한 숙의민주주의 방식은 여러 가치와 이해관계가 혼재된 문제를 푸는 데 적합했다는 대체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시민 참여의 장을 마련하고 중요한 사안에 시민의 관심을 집결시켰다는 데 효과적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었다. 새로운 에너지 패러다임에 ‘소비자의 참여’가 그 중심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시민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집결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깨끗하고 안전한 전기’, ‘지속성장 가능한 전력 산업’, ‘공유되는 가치와 이익’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전력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가치정렬 문제’에 해당된다. 에너지기본계획에 시민이 참여하는 숙의민주주의 방식을 고려할 시점이 왔다. 언론과 여론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의사결정 체계의 틀을 바꿀 필요가 있다.
에너지 전환은 빠르게 가는 문제이기보다는 멀리 가야 하는 여정에 가깝다. 잘 알려진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에너지 정책에 정말 잘 들어맞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