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진 경희대학교 원자력공학과 교수
▲정범진 경희대학교 원자력공학과 교수 |
보험회사도 위험에 대한 통계를 관리한다. 사망보험료를 책정할 때, 일상적인 삶에서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사망할 확률을 알아야 사망자수를 추산할 수 있다. 그러면 연간 보상금으로 얼마나 지불해야 할지 계산할 수 있다. 이것을 가입자수로 나눠서 보험료를 책정한다. 따라서 사회의 위험에 대해 가장 잘 관리된 통계는 보험회사가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자력발전소를 설계할 때 안전목표를 설정한다. 일상 생활에서는 대개 안전목표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학에서는 필수적이다. 이 목표에 따라서 안전성의 수준을 결정한다. 더 안전하면 더 좋을 것으로 여기겠지만 일정 수준의 안전을 충족했는데 더 안전하게 하는 것은 비용만 증가한다. 사회의 위험요소는 원전만이 아니다. 교통, 직장생활, 범죄, 행락시설 등은 여러 가지 위험요소가 있다. 그 가운데 어느 하나의 안전성만을 매우 높이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안전성을 높이는 것이 비용 대비 효과적이다. 따라서 가장 위험한데에 사회적 자원을 투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원자력 안전의 정성적 목표는 ‘원전을 건설하고 운영함으로 부당한 위험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정당한 위험을 끼치겠다는 말이다. 시설이 있는데 위험성을 0로 만들라는 것은 뭐든 하지 말자는 주장일 뿐이다. 세상에 제로 리스크는 없다. 이러한 안전목표를 정량화한 것은 원자력발전소 건설과 운영으로 인해 추가되는 위험이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위험의 천분의 일 그치도록 하는 것,곧 ‘천분의 일’ 원칙이다. ‘천분의 일 원칙’을 원전 설계에 적용한 것이 원자로 노심의 손상빈도다. 쉽게 말해서 심각한 사고가 발생해서 원자로 내부가 녹을 확률을 계산해 보는 것이다. 이때가 비로소 대중과 환경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과거 원전은 노심 손상빈도 ‘10-4/년’에 맞춰 설계했다. 노심이 1만 년에 한 번 빈도로 손상될 확률이 되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 노심 손상빈도를 ‘10-5/년’으로 기준을 높였다. 그 이유는 원전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10-4/년에 원전의 개수를 곱하다보면 10-3/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천분의 일 원칙을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건설된 원전을 계속운전을 한다면 노심 손상빈도는 어떤 기준으로 맞춰야 할까? 신규원전에 준해 10-5/년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최신기준에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원전은 계속 가동하고 있었던 원전이고 10-4/년이라는 기준으로 설계되고 운영돼도 천분의 일 원칙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계속운전에서도 같은 기준을 유지해도 상위목표인 천분의 일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더 안전하면 좋겠지만 안전에는 돈이 들어간다. 이 돈은 한국전력이나 한국수력원자력의 돈이 아니다. 결국 국민이 지불하는 돈이다. 이미 충분히 안전한 상태라면 조금 더 안전하게 하겠다고 엄청난 돈을 지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 돈은 다른 시설을 보다 안전하게 하는데 또는 복지나 교육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천분의 일 원칙’은 원자력 안전의 최상위 목표다. 이 목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하위 목표와 규정들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요즘 규정이 복잡해지고 분절화돼 업무를 추진하게 되면서, 앞뒤를 헷갈리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계속운전되는 원전도 신규원전과 동일한 기준을 충족시킬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10년에 한 번씩 원전의 안전성을 다시 점검할 때도 최신 규정을 적용하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나오게 됐다. 멀리 보고 길을 가야 길을 잃지 않는다. 원전의 안전에 대해 생각할 때 최상위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