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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차 IAEE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허은녕 서울대 교수·박종배 건국대 교수·장영호 싱가포르과학대 교수·박희천 인하대 교수(왼쪽부터) |
제44회 세계에너지경제학회(IAEE·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Energy Economics) 국제학술대회의 첫 행사는 사우디아라비아 에너지부 장관의 연설로 시작됐다.그는 사우디가 석유·가스를 넘어 수소, 재생에너지, 배터리 및 전략광물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에너지·자원전략을 수립했고 여기에 수조 원에 이르는 재정을 투자할 것임을 밝혔다. 실로 대단한 계획이다.
그런데 한국 참가자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선언이 아니고 이후 학술대회의 주요 세션에서의 사우디 전문가들의 발표였다. 발표 자료의 세밀함과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풍부한 정보는 이미 사우디가 수년간 해당 이슈들에 대하여 정부의 지원으로 전략적이고 착실히 연구를 진행하여왔음을 알려준다. 그 범위도 실로 광범위했다. 석유·가스 부문의 발표는 소수였고 수소, 재생에너지, 배터리, 전략광물 등 다양한 부문에서 높은 수준의 논문발표와 기조연설이 진행됐으며, 세계 주요 국가들의 투자를 유인하는 정책의 발표까지도 세밀한 준비를 했음을 확인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장관의 발표가 그냥 적당히 준비한 선언이 아니고 진지하게 오랫동안 준비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저 부러워할 수 밖에 없었다.
IAEE는 에너지경제학 분야의 세계 최대 학술단체이다. 미국에 본부가 있으며 84개국의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특히 국제학술대회는 대학과 연구기관의 학술적인 발표 뿐만 아니라 에너지기업과 정책분석기관, 그리고 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종합적인 형태로 개최해왔다. 국제 유명 인사의 발표는 물론 DOE, BP, OPEC 등이 발표하는 최첨단 정보도 함께 얻을 수 있다. 한국의 참여도 활발한 편이다. 현재 IPCC의 의장인 이회성 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이 학회장을 맡았었으며, 박희천, 장영호, 허은녕 교수 등이 이사회 구성원과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은 2013년 6월에 제34회 국제학술대회를 유치한 바 있다.
지난 4일부터 10일까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제44회 IAEE 국제학술대회는 3년 만에 100% 대면으로 열린 데다 중동지방에서 최초로 열렸기에 800여 명의 많은 전문가가 참여했다. 사우디 국영석유회사인 아람코를 비롯하여 전력회사, 석유화학회사 등 주요 국영기업들이 지원한 이번 학술대회는 일반참가자 전원의 등록비와 모든 편의를 무료로 제공하는 등 ‘돈 자랑’ 역시 확실하게 했다.
이번 학술대회의 기조연설자로는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The Prize’의 저자이며 최근 ‘The New Map’을 저술한 대니얼 예긴 (Daniel Yergin)이 초청됐다. 그는 에너지전환으로 인하여 새로운 국제이해관계의 충돌과 경쟁이 나타나고 심화될 것임을, 그리고 상당기간 석유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전문기관의 예측과 그동안 석유가스부문의 투자가 부족했음을 지적하며 석유가스의 공급부족이 심화될 것이 우려된다는 전문가들의 경고를 전했다.
학술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저자를 비롯한 한국 참가자들은 이번 학술대회에서의 큰 특징을 다음의 세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첫 번째가 전략광물의 등장이다. 석유, 가스, 석탄 등 화석에너지원의 경우 그 생산과 소비에 광물이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에너지 안보나 기후변화협약 등의 논의에 전략광물을 중요하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는 사뭇 다르게 진행되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하여 증가하는 원자력이나 재생에너지 등 전력생산 및 배터리 등 저장장치의 증가는 구리와 리튬을 비롯한 여러 광물과 원재료를 엄청나게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됨을 확인한 것이다. 기조연설을 한 대니얼 예긴 역시 구리가 약 15배 이상 더 필요로 하게 된다면서 이 문제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전략광물 문제는 나아가 기존에 화석연료가 사용됐던 물, 식량 등의 생산과 소비과정에도 영향을 주며, 광물의 대량생산은 광산에서의 환경과 불법채굴 등은 ESG로 인한 규제의 대상이 된다. 학술대회에서는 전략광물을 포함하는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안보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됐으며, 이들 전략광물의 공급망 구축 및 중국의 영향력 등이 심도 있게 논의됐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특히 자국 내 주요 광산의 개발 증대는 물론 세계적 공급망 연계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해 주목받았다.
두 번째는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이른바 ‘봉’임을 확인한 것이다. 한·중·일 3국은 중동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수입하지만 학술대회 참여자는 소수였다. 반면 미국, 영국, 인도 등 영연방국가들은 수십 명의 전문가들이 학술대회 훨씬 전부터 현지에 와서 사우디 정부 및 관계자들과 논의를 진행했으며 이들 간에 수십 년간의 관계가 쌓여 왔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은 늦게 풀린 코로나 방역 탓에 시진핑의 방문이 있었음에도 홍콩 참가자만 있었고 일본도 IEEJ 대표 등 소수 정예의 참가에 그쳤다. 개최 장소인 KAPSARC(King Abdullah Petroleum Studies and Research Center)에는 270여명의 다국적 학자들이 모여서 연구하고 있지만 한·중·일 3국출신 연구자는 한 명도 없다.반면 인도 연구자는 수십 명에 달했다. 사우디가 영국의 식민지였음을 고려하더라도 동북아 국가들의 중동 무시와 무지가 심각한 수준임을 느꼈다.
세 번째는 장기적이고 집중적인 연구가 가지고 오는 매서움이다. 사우디 왕립 석유연구소인 KAPSARC 소속 발표자들이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석유는 물론 전기, 재생에너지, 배터리, 광물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고도의 높은 분석 방법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물이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수준의 연구를 한 적이 언제였던지 크게 반성하게 됐다. 풍부한 자금과 에너지자원, 그리고 장기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사우디가 이루고 있는 연구업적에 제대로 한 방 맞았음을 자인할 수 밖에 없었다. 전력원 믹스라는 내부 주제에 함몰되어있는 한국의 사정과 사뭇 다른 국제학술대회의 모습에 한국 참가자들은 다시 한 번 에너지가 국제적인 이슈이며 우리나라는 여전히 90% 이상의 에너지와 전략광물을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임을 그저 외면하고 살아왔음을 뼈저리게 반성하게 한 학술대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