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곡법, 윤 대통령 1호 거부권 될까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3.04.0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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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3월 2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편집자주] 에너지경제가 경제칼럼니스트 곽인찬이 쓰는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코너를 신설합니다. 경제를 중심으로 여러 현안을 쉽게 풀어쓰겠습니다. 동시에 독자 여러분과 지혜를 나누려 합니다. 큰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두고 정치권이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하다. 국회를 장악한 더불어민주당은 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재명 대표는 자신의 1호 민생법안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부와 여당(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다. 윤 대통령은 이르면 4일, 늦어도 11일 국무회의에서 재의 요구(거부권) 를 공식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정치권은 아예 살얼음판마저 깨져버릴 공산이 크다. 양곡법을 둘러싼 쟁점은 무엇인지, 지난 정부에선 거부권을 놓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등을 짚어보자.


◇ 무엇 때문에 다투나


쌀값이 떨어져 농가 수익이 준 게 가장 큰 배경이다. 며칠 전 통계청은 ‘2022년산 쌀 생산비 조사 결과’를 내놨다. 여길 보면 지난해 10a(아르·1000㎡)당 쌀 생산비는 85만4000원으로 전년비 6만2000원, 곧 7.9% 올랐다. 반면 10a당 쌀 순수익은 31만7000원으로 전년비 18만5000원, 곧 36.8%나 줄었다. 공급 과잉으로 쌀이 남아돌았기 때문이다.

농촌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에게 쌀값 하락은 예삿일이 아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가 먼저 움직였다. 지난해 8월 농해수위는 정부에 쌀 가격 폭락 대비책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냈다. 그 즈음 의원들은 양곡법 개정안을 앞다퉈 발의했다. 남아도는 쌀을 정부가 전량 수매하라는 게 핵심이다. 이어 농해수위는 10월에 야당 단독으로 양곡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절차에 따라 개정안은 법사위로 넘어갔다. 법사위는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 위원장은 시간을 끌었으나 국회 본회의 직회부를 막진 못했다. 민주당은 지난해 법사위원장 자리를 국민의힘에 내주는 대신 국회법을 바꿔 법안의 법사위 계류 기간을 120일에서 60일로 단축했다. 양곡법은 이 법을 적용한 첫 사례다.

정부도 구경만 한 것은 아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3월8일 ‘2023년 쌀 적정 생산대책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벼를 심는 논 면적을 줄이고, 벼 대신에 콩·가루쌀 등 전략작물을 키우면 보조금을 준다는 내용이다. 구조적인 과잉생산이 쌀값 하락을 부르고, 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재정으로 수매(시장 격리)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대안은 야당을 설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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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23일 오후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양곡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에 대한 수정안이 통과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마침내 민주당은 3월23일 양곡법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재석 의원 266명 가운데 169명이 찬성하고 90명이 반대했다. 169석을 가진 막강 민주당의 힘이 여실히 드러났다. 개정안은 쌀 생산량이 평년보다 3~5% 늘거나 쌀값이 평년보다 5~8% 떨어지면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매입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튿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에 여야가 따로 없는 만큼 윤석열 대통령이 즉시 ‘쌀값 정상화법’을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고 썼다. 이 대표는 양곡법 개정안을 ‘농촌을 보호하고 식량안보를 지켜낼 방안’이라고 평가했다.


◇ 거부권은 대통령의 권한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가 양곡법을 보는 시각은 하늘과 땅만큼 멀다.

지난해 10월 윤 대통령은 출근길 문답(도어스텝핑)에서 상임위를 통과한 양곡법 개정안이 "농민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으로 매입을 의무화하면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과잉공급 물량을 결국은 폐기해야 한다. 농업 재정의 낭비가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등 주무부처 장관들은 3월 28일 국무회의에서 "국회에서 재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한덕수 총리는 29일 대국민 담화문에서 양곡법 개정안은 ‘남는 쌀 강제매수 법’이라며 재의 요구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법률안 거부권을 보장한다. 제53조를 들춰보자. ②항은 "법률안에 이의가 있을 때 대통령은 국회로 환부하고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④항은 "재의 요구가 있을 때 국회는 재의에 붙이고,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전과 같은 의결을 하면 그 법률안은 법률로서 확정된다"고 규정한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의회의 입법권 남용을 견제하는 권한을 부여한다. 동시에 헌법은 그러한 대통령의 반대마저 넘어설 수 있는(Override) 권한을 주었다.


◇ 역대 대통령들은 거부권을 어떻게 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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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회 입법조사처 ‘역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해외 사례’ 2023년 3월31일 이슈와 논점 제2080호


국회 입법조사처는 얼마전 ‘역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해외 사례’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에 따르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후 문재인 대통령까지 총 12인 중에서 이승만·박정희·노태우·노무현·이명박·박근혜 등 6명이 총 66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66건 가운데 45건은 이승만, 5건은 박정희가 행사했다. 87년 체제 출범 이후만 보면 노태우 7건, 노무현 6건(2건은 당시 고건 총리가 권한대행 자격으로 행사), 이명박 1건, 박근혜 2건 등 모두 16건으로 집계됐다.

87년 체제에서 거부권을 썼을 때 승률은 대통령이 압도적으로 높다. 국회가 재의결을 통해 법률로 확정한 경우는 16건 중 단 1건에 그친다. ‘3분의 2’ 규정의 벽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이는 의회를 견제하는 수단으로서 대통령 거부권이 실효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을 앞둔 2013년 1월 이른바 택시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중교통 육성 및 이용 촉진법’ 개정안은 택시를 대중교통 수단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뼈대로 했다. 택시업계의 숙원이었다. 법안은 국회의원 총수의 3분의 2를 훌쩍 넘긴 222명 찬성으로 가결됐다. 여야 합작품이란 얘기다.

택시가 대중교통 수단으로 인정받으면 정부 지원을 넉넉히 받을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택시법을 대선을 앞둔 포퓰리즘 입법으로 보고 재정 부담 등을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 법은 결국 폐기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과 악연이 있다. 2015년 개정안은 국회가 정부 시행령에 간섭할 수 있는 근거를 담았다. 당시 유승민 원내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지도부가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에 동조했다. 박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주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승민은 아직도 ‘배신자’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본회의에 재상정된 개정안은 새누리당 의원들의 불참 속에 정족수 부족으로 흐지부지됐다.

이듬해인 2016년 박 대통령은 또 한번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으로 맞섰다. 이번 개정안은 상임위 별로 국정 현안 청문회를 1년 365일 열 수 있도록 했다. 법안은 재석 222명 가운데 찬성 117명, 반대 79명로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과 탈당파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정부는 상시 청문회 아래선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박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법안은 폐기됐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은 여당이 다수당을 차지한 여대야소 국면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소야대 구도 아래서 거부권 카드를 썼다.

문재인 대통령은 거부권을 한 차례도 행사하지 않았다. 거부권을 행사해달라는 기업인의 요청도 뿌리쳤다. 2020년 3월 박재욱 타다 대표는 "혁신과 미래의 시간을 위해 (타다금지법에 대해) 대통령님의 거부권을 행사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으나 소용없었다.


◇ 윤 대통령 이번에도 뚝심 보일까


헌법이 보장한다고 해서 거부권을 조자룡이 헌칼 쓰듯 함부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거부권은 국회 고유의 입법권과 충돌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은 거부권을 쓰더라도 절차와 형식을 갖추려 애썼다. 한덕수 총리가 대국민 담화를 낸 것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윤 정부와 야당은 지금도 서로 원수 보듯 한다. 이 마당에 거부권을 쓰면 사이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재명 대표는 3월30일 페이스북에 "일본 멍게는 사도 우리 쌀은 못 산다?"는 짧은 메시지를 올렸다. 31일 당 최고위원 회의에선 "쌀값 안정화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식량 안보전략 포기 선언이나 마찬가지"라며 "정부·여당이 우리 농민과 농촌을 짓밟을 태세"라고 주장했다.

내년 4월 총선도 신경이 쓰인다. 이때 의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면 윤석열 정부는 5년 내내 소수당 정권의 비애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1년 뒤 총선에서 민주당은 정부·여당이 양곡법을 가로막았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할 게 뻔하다.

쌀 소비량은 해마다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이 판국에 남아도는 쌀을 다 사주라는 양곡법 개정안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는 이성보다 감정이, 재정건전성보다 포퓰리즘이 들끓는 곳이다. 정치인이 선거 불이익을 감수하는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

윤 대통령은 대일 외교에서 만만찮은 뚝심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 바람에 지지율이 떨어졌다. 그 뚝심을 양곡법 거부권에서도 이어갈 수 있을까.

<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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