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수소배관망 구축, 네덜란드 '하수니'가 좋은 본보기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3.12.28 08:36

김재경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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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경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일부터 15일까지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하면서 우리 조야에서는 때아닌 네덜란드라는 서유럽의 강소국에 관심이 쏠렸다. 윤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의 정상회담이나 세계유일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생산기업 ASML 본사 방문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한·네덜란드 간 반도체 동맹 강화가 주된 목적이었다. 이 밖에도 국사책에서 ‘헤이그 특사’로 배운 ‘이준’ 열사의 기념관 방문 등을 통해 우리와 네덜란드의 역사적 관계를 환기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

한편으로 필자와 같은 에너지·자원경제학자에게 네덜란드는 이른다 ‘네덜란드병(Dutch Disease)’을 떠올린다. 네덜란드병이란 대규모 유전·가스전이 발견되면, 신기하게도 제조업이나 농업 등이 오히려 쇠퇴하면서 경기침체·대규모 실업이 발생하는 독특한 경제 현상을 말한다. 얼핏 대규모 유전·가스전이 발견되면 온 국민이 돈방석 위에 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석유·천연가스를 팔아 벌어드린 대규모 외화가 국내로 유입되면, 상대적으로 자국 통화가 비싸지고 환율이 떨어져, 공산품·농산물 등 다른 품목의 수출길이 막히는 기막힌 상황이 연출된다.

이런 상황은 실제로 1960~70년대 네덜란드 제조업에서 발생했다. 1959년 대규모의 ‘흐로닝언(Groningen) 가스전’이 발견되면서다. 2013년 생산량이 약 2조 570억㎥에 달한다. 러시아를 제외하고 유럽지역 최대 규모로, 심지어 일국의 제조업 쇠퇴까지 유발할 정도였다. 흐로닝언 가스전은 수익의 70~95%가 네덜란드 정부에 귀속돼 오늘의 네덜란드 복지 국가시스템을 있게 한 경제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흐로닝언 가스전이 최근 폐쇄됐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차원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스 추출로 지반 침하가 심해져 1991년부터 주변 지역에 빈번한 지진을 유발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흐르닝언 가스전은 2014년부터 단계적으로 생산을 줄이기 시작해 올해 10월 1일자로 생산이 완전중단됐다.

이에 따라 가스 배관 네트워크를 통해 네덜란드를 넘어 유럽전역으로 흐로닝언산 천연가스를 실어나르던 네덜란드 가스유통공사 ‘하수니(Gasunie)’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더욱이 탄소중립 이행에 따른 예정된 천연가스 수요 감소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하수니는 결국 가스에서 수소유통공사로 변신했다. 이를 위해 주로 북해의 대규모 해상풍력단지에서 생산하는 그린수소를 네덜란드 전역으로 유통할 수 있는 연장 1200㎞ 수소 전용배관 네트워크를 2030년까지 구축하는 ‘Hydrogen Backbone’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 두 가지 이목을 끄는 부분이 있다. 먼저 소요예산 15억 유로(약 1조5000억원)의 절반을 정부가 부담한다는 점이다. 전국 단위의 수소 배관 네트워크 구축이 일종의 고속도로처럼 관련 산업발전에 필수적이지만 아직 불확실한 수소 수요로 수익성을 충분히 담보하기 어려워 민간이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진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칫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이냐 논쟁의 늪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네덜란드 정부가 과감히 위험을 분담해준 것이다.

네덜란드 정부의 과단성도 본받을 만하지만, 이를 이끌어낸 하수니의 전략도 눈에 띈다. 하수니는 1200㎞의 수소 배관 중 85%를 기존 가스 배관을 개조·재목적화해 수소로 전용한다는 방침이다. 이 경우 구축비용이 신규 배관의 20~25% 정도로 저렴해지면서, 동시에 좌초자산을 재사용해 탈탄소화 정책 실행에 따른 자원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게 했다. 정부 재원은 결국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온 세금이다. 그래서 위험부담이 큰 이 같은 대규모 인프라 사업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좋을 수만은 없다. 이처럼 비용 효과적이면서도 기발한 방안으로 소모적 논쟁을 피하면서 의회를 설득할 수 있는 소구력도 가질 수 있게 됐다.

현재 우리나라 수소경제도 기존 수송 중심에서 발전·산업 중심으로 중심축이 옮겨가면서, 수소 전용배관 구축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네덜란드처럼 전국단위까지는 아니라도 평택 등 수도권, 광양만권, 부·울·경 권역 등지에서 수소 전용배관 환산망에 대한 검토가 현재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나 네덜란드나 대규모 배관 구축에 수반되는 위험부담이나 사회적 논란은 비슷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수니 사례처럼 더 과감한 정부 지원과 함께 이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비용 효과적인 구축 방안 마련을 위한 이해당사들의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하수니의 사례를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정훈식 기자 기사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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