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총수 집 앞으로”···‘묻지마 시위’ 몸살 앓는 재계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4.08.04 11:08

전삼노 노사 협상 창구 아닌데도 이재용 자택 앞 기자회견

정의선·김승연·이재현 등도 집회 ‘타깃’…일부선 황당 주장도

주민 피해·교통 정체 등 호소…“건전한 노사 관계 조성해야”

“적은 지분으로 그룹 지배 총수 경영 문화의 부작용” 지적도

지난 2022년 택배노조 조합원들이 이재현 CJ그룹 회장 자택 주변 어린이보호구역에 걸어놓은 피켓들. 온갖 욕설과 비속어들이 적혀 있다. 사진=박규빈

▲지난 2022년 택배노조 조합원들이 이재현 CJ그룹 회장 자택 주변 어린이보호구역에 걸어놓은 피켓들. 온갖 욕설과 비속어들이 적혀 있다. 사진=박규빈 기자.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자택 앞.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 조합원들이 임금을 올려달라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등기임원이 아니라 사측 협상 대표자가 아니다. 심지어 그는 유럽 출장 중이라 이날 집에 없었다.




재계 주요 기업들이 '묻지마 시위'에 몸살을 앓고 있다. 개인 또는 단체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라며 무조건 총수 집 앞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탓이다. 이웃 주민들이 피해를 호소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 대기업 회장 '사정권'…주민 피해 반복



4일 재계에 따르면 전삼노가 이 회장 자택 앞으로 향한 이유는 총파업 문제 해결을 위해 이 회장이 나서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다. 지난달 8일 총파업을 시작한 전삼노는 지난달 29일부터 사흘간 사측과 임금 인상과 성과급 제도 개선 등을 놓고 협상을 벌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자택 앞에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박

▲1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자택 앞에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박규빈 기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총수 자택을 찾아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한화오션 노조는 지난달 15일 거제사업장에서 7시간 동안 파업을 벌이면서 서울 종로구 가회동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집 앞에서도 피켓시위를 했다. 2009년 해직된 쌍용자동차(현 KG모비리티) 노동자 일부도 서울 강남구 곽재선 KG그룹 회장 자택 앞에서 보상금 10억원씩을 달라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로 인해 인근 주민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총수일가 자택 근처에 사는 이들은 경찰서, 구청 등에 무분별한 시위를 멈추게 해달라고 탄원서 등을 내고 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피켓 문구가 노출되고 소음에 시달리는 한편 쓰레기 투기 등 문제도 심각하다고 전해진다.


지난 2022년에는 은마아파트 재건축 추진위원회 구성원들이 서울 한남동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자택 근처에서 한 달 넘게 도 넘은 시위를 벌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매일 관광버스를 타고 정 회장 집앞으로 와 'GTX-C 노선의 은마아파트 하부 통과를 반대한다'며 소란을 피웠다.




같은 해 초에도 민주노총 택배노조 150여명이 산하 CJ대한통운 노조의 파업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서울 중구 장충동 이재현 CJ그룹 회장 자택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었다.


2020년에는 한 시민단체가 배드민턴장을 무상으로 지어달라며 서울 한남동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 자택 앞에서 수차례 집회를 열었다. 이마트가 매입한 부지에 과거 배드민턴장이 있었으니 이마트가 이를 다시 지어야 한다는 황당한 이유에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집앞에서는 술을 마시며 삼겹살을 먹는 '삼겹살 폭식 투쟁'도 펼쳐졌다. 주가가 떨어졌다며 기업 총수 집앞에서 소동을 피우는 경우도 다반사다.


◇ “시민의식·경제체질 자체 개선해야"


일각에서는 재계 총수가 그룹 내 굵직한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경영 문화가 이 같은 악습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소한의 지분으로 주요 계열사 경영권을 장악해 권리를 누리는 만큼 큰 갈등이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하는 책임도 져야 한다는 논리다.


우리나라 헌법은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제20대 국회부터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개정안이 다양한 형태로 발의되고 있지만 총수 집 앞에 가지 못하게 할 방법은 없는 상태다. 다만 비상식적인 문구나 욕을 쓴 피켓을 들고 고함을 치는 등 '도를 넘은 행위'는 자제해야 한다는 게 재계와 노동계의 중론이다.


한 노동 분야 전문가는 “산별노조 제도를 도입하는 등 일정 수준 이 같은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나라 경제 체질과 재계 입장 등을 고려할 때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노조는 '무조건 투쟁'이라는 낡은 프레임을 버리고 사측은 노조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 등 건전한 문화를 조성하는 게 우선"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전삼노는 사상 첫 총파업에 돌입한 지 25일 만에 현업에 복귀했다. 임금 손실 부담과 대표교섭 노조 지위 종료 임박 등으로 무기한 총파업은 접었지만 게릴라식 부분 파업 등은 지속될 전망이라 업계에서는 노사갈등이 장기전에 들어 갔다는 평가다. 전삼노는 앞으로 국회·법조계·시민단체와 연대하는 등 파업 규모를 더욱 키운다는 계획으로 5일에는 국회에서도 별도 기자회견을 한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는 “원만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여헌우 기자 기사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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