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송전용량 중 산불 등 비상상황 대비 절반만 사용
송전제약 당하고 있는 석탄발전사 신뢰도 기준 완화 요청
당국, 대규모 정전 우려해 반려…전문가 “정치·사회 합의 문제”
전력당국의 송전망 확충 불이행과 송전망 활용 확대에 대한 책임회피로 정부를 믿고 전력시장에 참여한 강원동해안 지역 발전사들은 물론 강원지역 경제가 피해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런현상은 이미 수년전부터 예측된 일이지만 산업부와 한전, 전력거래소 등 전력당국은 여전히 책임회피만 하고 있다"며 “정부의 전력 수급계획에 따라 국가 전력수급에 기여하기 위해 참여한 사업자들만 고사위기로 내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서해안과 동해안에 위치한 대규모 원자력발전소와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해 수도권과 대도시로 송전하는 중앙집중형 전력계통을 운영하고 있다. 인구의 대부분이 밀집한 수도권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방안이다.
지난 2011년 9월 발생한 순환정전 사태로 민간 대기업들과 발전공기업이 정부의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동해안에 신규로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해왔다. 2022년부터 순차적으로 완공이 됐지만 정작 생산한 전기를 보낼 송전망 확충이 각종 민원에 막혀 가동률이 15%대에 그치는 등 매년 수천억에 달하는 적자를 보면서 무용지물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발전소의 가동률이 최소 60%는 돼야 건설비 등 고정비와 연료비를 회수할 수 있다. 절반인 30%로 가동률이 제한되면 수익악화를 넘어 부도의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어 업계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올해 강릉에코파워 3000억원, GS동해전력이 500억원, 포스코 삼척블루파워도 시운전을 마치고 나면 연간 2600억원 정도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전기 생산지와 소비지가 다른 구조로 인해 대형발전소의 입지선정과 고압송전의 주민수용성 문제 등 사회적 갈등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지만 송전망 건설 주체인 정부나 한전이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전력당국에 송전망 확충을 적기에 할 수 없다면 계통 운영 신뢰성 기준을 일시적으로 완화해 송전망 이용률을 높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당국은 정전 가능성, 안정성 우려 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산불 등 자연재해 혹은 사고로 인해 송전 설비가 고장날 경우를 상정해 이에 대응하기 위한 'N-2' 신뢰도 기준을 계통 운영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설치된 전력망 설비 가운데 절반은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예비회선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해도 송전망 이용이 가능한 수준으로 전력 신뢰도를 설정해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가능하게 하는 신뢰도 기준이지만 송전망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발전사업자들이 신뢰도를 지키기 위해 발전량을 줄여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로 인해 발전단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발전소들이 가동되지 못하면서 발전사는 물론 한전의 적자가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에 이 기준을 완화해 예비회선 중 일부를 운영토록 하면 계통 운영에 여유가 생길 것이란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계통 신뢰도 기준 완화로 연료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석탄화력이 더 가동되면 한전의 도매전력구입비도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손용호 강릉에코파워 부사장은 “현재 동해안과 수도권 송전망 규모는 22기가와트(GW)지만 N-2 신뢰도 기준이 적용돼 용량의 절반인 11GW만 운영되고 있다"며 “지난 4월부터 동해안에 위치한 민간과 공공 석탄발전소가 모두 멈춰 있는 상황이다. 개별 발전사로 보면 강릉에코파워는 올해 동안 발전률 44%를 예상했으나 현재 15%에 그치며 3000억원에 달하는 적자를 봤다"고 말했다.
현재 전국 각지에서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민원이 많다 보니 독점 송전 사업자인 한전이 약속한 기한 내 완공하지 못하는 상황도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송전망 확충이 없으면 에너지원을 막론하고 발전기를 아무리 늘려도 무용지물이다.
송전망 부족 문제는 원자력, 석탄화력, 재생에너지 등 전력시장의 최대 난제로 꼽힌다. 늘어나는 발전설비를 감당하지 못해 발전소들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전력거래소에 따르면 2012~2022년 우리나라 발전설비는 8만1806MW에서 13만8018MW로 69%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 송전선로는 3만676km에서 3만4944km로 14% 확충되는 데 그쳤다.
최근 준공된 동해안의 석탄화력발전소들은 기존 원자력발전소가 많은 상황에서 계획대로 송전망이 확충되지 않아 절반 정도만 가동되고 있다. 송전망 부족과 이로 인한 출력 제어 사태는 에너지원을 가리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에너지업계 한 관계자는 “원자력이나 재생에너지를 대폭 늘리는 게 문제가 아니다. 물론 누구든지 재산권이 있고 자연경관도 해치는 만큼 좋아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며 “지중화와 충분한 보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이를 담당하는 한전은 대규모 적자로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정부와 한전이 수행하지 못할 경우 신뢰도를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등 특단의 대책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손 부사장은 “봄이나 가을 등 기온변화가 상대적으로 덜한 계절에 N-2 기준을 소폭 완화해 송전망 이용률을 올려주면 발전사들과 한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전력당국에 그동안의 비상상황 발생 빈도 등 신뢰도 기준 완화 근거 자료를 요청했지만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송전망을 새로 짓지 못한다면 기존 설비부터 잘 활용해 사업자들도 살리고 한전의 적자 완화도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진표 태평양 변호사는 “신뢰도 기준을 완화했을 때 리스크가 생긴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상황별로 정확히 따져봐야 한다. 산불과 태풍 등 자연환경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고 정말 막을 수 없는 불의의 사고는 확률이 높지 않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이어 “송전망 부족문제는 재생에너지 때문에 부각되고 있지만 10여년 전부터 제기됐다. 전력당국은 지금까지 송전선로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숨겨 그 비용을 미래세대에 전가하고 있다"며 “사실 반도체와 일부 품목을 제외하면 이정도 전력 신뢰도가 필요한 곳은 많지 않다. 그간 일부 수요처를 위한 비용을 모든 국민들이 나눈 것이다. 국민들에게 한전의 적자를 만회하고 전기요금 인상요인을 줄이기 위해서는 계통 신뢰도를 완화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리고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력당국 관계자는 “사업자들의 입장도 이해하지만 신뢰도를 완화했을 때, 만에 하나 대규모 정전 등 사고가 발생할 경우 책임소재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신뢰도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국민들이 이를 감내하고 수용할 수 있는지, 즉 정치적·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산업부는 오는 10일 전력망혁신 T/F 겸 전력계통 신뢰도협의회 등과 '가을철 전력계통 안정화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