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위원회, 전력직접구매 운영규칙 개정안 심의 통과
사실상 제도 활성화, 한전 거치지 않고 전력구매 가능
첫 신청자 SK어드밴스드 효과 보면 산업계 신청 잇따를 듯
한전 원가 이하 판매로 심각한 적자, 최대 수혜자는 산업계
전력시장 선진화 신호탄, 망사용료 부과로 실질효과 없다는 전망도

전력당국이 전력직접구매를 허가하자 한국전력공사도 대책 마련에 돌입하고 있다. 전력직접구매는 고객사가 한전을 거치지 않고 거래소로부터 직접 전력을 공급받는 제도를 말한다. 전력업계에서는 이 제도로 총 수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산업용 고객들이 한전에서 이탈할 경우 그동안 반영되지 못한 연료비 인상분이 나머지 소비자들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31일 전력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2021년부터 2023년 동안 급격한 국제연료비 인상에도 이를 국내 요금에 온전히 반영하지 못했고 이에 산업계는 한전의 적자에도 저렴한 요금을 사용해왔다. 한전은 누적 적자가 40조원을 돌파하는 등 심각한 재무 위기가 계속되자 지난 2023년 11월과 2024년 11월 연이어 산업용 요금만 잇따라 올린 바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글로벌 공급망 위기로 경영이 악화된 산업계가 비용 절감을 위해 한전을 거치지 않는 전력직접거래를 신청했고 정부가 이를 승인했다.
지난 28일 전기위원회는 제310차 회의를 열고 전력직접구매와 관련한 전력시장운영규칙 개정안을 심의해 통과시켰다. 이 안건은 지난 1월에 처음 상정됐으나 보류됐고, 2월에는 상정이 되지 않았다. 기존 전기사업법상 전력직접구매를 신청한 기업의 계약기간을 1년에서 3년으로 늘려 가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규칙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사실상 기업의 전력직접구매 제도는 활성화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력당국은 '전력시장 선진화' 차원에서 전력직접구매 확산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전력 도매시장에서는 다수의 전력 공급자가 있지만 한전이라는 단일 독점 수요자가 존재하며, 소매시장에서는 한전이 독점 공급자로서 모든 전력 소비자를 상대하고 있다. 이번 결정이 전력시장 구조 개편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종민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 입장에서 도매시장 접근권은 단순히 비용 절감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본질적 권리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마치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연결되는 것과 유사하다. 중간 유통업자의 역할이 사라지면서 거래 효율성이 증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도매시장에서 전력을 구매할 수 있는 권리는 단순히 기업의 이익을 넘어 경제 효율성의 문제로 연결된다"며 “도매 전력 가격이 소매 가격보다 낮다는 점은 경제적으로 명백하며, 기업들이 도매시장에서 전력을 구매할 수 있다면 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권력이 어느 방향으로 재편되든, 미래를 이끌 새로운 권력에게 전력시장 개혁은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 낼 강력한 이니셔티브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며 “보수 진영에게는 시장경제의 원칙을 적용하는 정책으로, 진보 진영에게는 기득권 구조를 해체하고 에너지 전환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매력적인 아젠다를 제공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산업계가 부담하지 않은 요금 인상분은 결국 나머지 전기사용자에 전가될 것"
다만 일각에서는 산업계가 전력직접구매로 빠져나가는 것은 '체리피킹'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전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총 43조원의 누적적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한전이 원가보다 저렴하게 전력을 판매했기 때문이다. 국제 에너지가격 폭등으로 발전단가가 크게 올랐으나, 물가안정을 위해 전기요금 인상을 자제하면서 천문학적인 적자를 보인 것이다. 현재 한전은 총부채 204조원, 부채율 514%로 심각한 재무위기를 겪고 있다.
산업계는 그동안 저렴한 전력을 맘껏 사용하다가 최근 한전이 적자 보전을 위해 산업용 요금을 2차례 인상하자 전력직접거래로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1호 신청기업인 SK어드밴스드를 시작으로 줄신청이 나올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산업계가 부담하지 않은 요금 인상분은 결국 가정용을 포함한 나머지 전기사용자가 분담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번에 전기위원회를 통과한 전력직접구매와 관련한 전력시장운영규칙 개정안에는 한전의 연료비 미반영분을 보완 대책은 포함되지 않았다.
정연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그동안 사용해 온 저렴한 산업용 전기요금은 그대로 한전의 적자로 누적됐다"며 “요금이 오르자 기업들이 이런식으로 이탈한다면 그동안 기업들이 부담을 안한 인상분은 결국 전체 소비자들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기업들은 직접전력거래를 한번 사용해보고 나중에 한전 요금이 더 저렴해지면 다시 한전 계약으로 복귀하면 된다. 한전과 계약기간이 전력직접구매 의무기간인 3년의 3배인 9년으로 늘고, 전력시장 회원에서 제명되는 것 외엔 별다른 패널티가 없다"며 “기업들의 선택이 전체 전력시장의 건전성을 저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2023년 기준 한전의 용도별 전기판매 비중을 보면 산업용 53%, 일반용 24%, 주택용 15%이다. 그동안 한전의 저렴한 전기요금의 최대 수혜자는 산업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23년 용도별 전력 사용량 비중. 자료=한전
한전 “망사용료 차등 등 대책 마련할 것"
한전은 이번 안건 통과에 맞춰 직접거래 사용자들에 대한 망 요금 부과 등 대책 마련에 착수한 상태다.
한전은 이번 안건에 반대 입장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전은 지난 3년간 기록한 43조원이 넘는 영업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산업용 전기요금을 인상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있었다. SK어드밴스드가 직접거래의 효과를 볼 경우 다른 기업들의 신청도 쏟아질 것이고, 이는 한전의 매출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시장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한전 독점을) 무조건 풀어줘야 한다는 취지인데 그렇다면 그 전제 조건이 한전이 각종 비용을 반영한 적정 가격으로 소매가격을 책정하는 상황이어야 한다"며 “지금은 모든 인상요인이 규제로 막혀 이를 한전이 온전히 부담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쟁만 활성화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기업들이 전력직접거래를 사용해도 큰 요금인하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란 분석도 있다.
한전 측은 “한전의 산업용 전기 사용자와 달리 직접거래 사용자에게는 망 사용료를 부과하게 되어 있다"며 “실제로 한전을 이탈해 직접거래를 하는 기업들이 나온다면 그에 맞게 기존 규정을 손볼 계획이다. 기존 산업용 전기 사용 고객과 차등을 두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전력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은 SMP 비용만 고려해 신청을 할텐데 그 외에도 부가 정산금이나 한전의 망 사용료 책정 등 이것저것 들어가는 비용을 다 따져보면 크게 이득이 없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