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간 수고 많았습니다”…국가 에너지 첨병역할 마친 대한석탄공사, 청산 절차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5.06.25 06:34

1950년 설립 후 70년대까지 국가 핵심 에너지기업 역할

1970년대 석유파동 후 제2 전성기 맞았으나 이후 급추락

1987년 경영합리화 수립, 10년만에 탄광 347→11개 축소

6월까지 도계광업소 폐광, 공사도 전직원 해고 뒤 청산 절차

노사 마지막 임금협상 타결, 도계광업소 폐광지원 대상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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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석탄공사의 탄광에서 채굴된 탄이 운반되고 있다. 사진=대한석탄공사 50년사

1950년 설립돼 75년간 석탄을 공급하며 서민 연료 공급과 국가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한 석탄공사가 에너지전환 흐름에 따라 역할을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25일 에너지업계에 따르면 대한석탄공사는 이달 말로 마지막 탄광인 도계광업소의 문을 닫는다.


강원도 삼척에 위치한 도계광업소는 개광이래 약 4324만7000톤의 탄을 생산했으며, 1950년 석탄공사 창립 이래로는 약 4214만3000톤을 생산했다. 1988년에는 127만120톤을 생산해 가장 많은 생산량을 기록했다.



하지만 도시가스의 보급으로 난방연료가 가스에너지로 바뀌고, 탄광의 노후화로 생산량도 2016년 33만7000톤에서 2023년에는 9만9000톤으로 줄자 결국 폐광을 하게 됐다.


도계광업소는 석탄공사의 마지악 탄광이다. 지난해 6월에는 강원도 태백에 있는 장성광업소가 문을 닫았고, 2023년에는 전남 화순광업소가 문을 닫았다.




이로써 석탄공사는 사실상 그 역할을 마치게 됐다. 공사는 이달까지 전 직원을 해고한 뒤, 청산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석탄공사는 현재 약 2조5000억원의 부채를 갖고 있다.


청산 방식에 대해선 아직 정부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비슷한 자원개발사업을 하는 한국광해광업공단으로 흡수합병 방안이 있으나, 광해광업공단도 3조7000억원 자본잠식 상태라서 여기에 추가로 부채를 떠안기면 재무상태가 더욱 부실해질 우려가 크다.


다른 방안으로는 자산을 처분한 뒤 남은 부채를 정부가 떠안는 방식이 있다. 어떤 안이든 정부가 일정 부분 부채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일제시대 수탈 대상…아오지탄광 매장량 150억톤

석탄합리화 정책에 따른 연도별 폐광 및 구조조정 근로자 수 현황. 자료=대한석탄공사 50년사

석탄합리화 정책에 따른 연도별 폐광 및 구조조정 근로자 수 현황. 자료=대한석탄공사 50년사

우리나라의 근대적 석탄개발은 19세기말 러시아인에 의해 시작됐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이 심화되는 가운데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으키자, 고종은 거처를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조선의 각종 이권을 독차지했다.


그런 와중에 1896년 4월 러시아인 니시첸스키가 함경도 경성과 경원지방의 석탄채굴권을 취득했다. 왕실이 최초로 석탄채굴을 허가한 것으로, 이를 국내 석탄산업의 효시로 본다.


1906년 국내 광업행정을 규정한 최초의 법률인 광업법이 제정됐다. 광업권 허가는 농상공부 소관이었지만, 왕실을 낀 궁내부에서도 처리하면서 중복적 채굴권이 허가되는 등 분쟁이 많아지자 일진회의 송병준은 농상공부 대신으로 입각하자마자 광업법을 제정하고 왕실을 견제했다.


일제는 1915년 12월 제령 제8호로 조선광업령을 제정하고, 1916년 2월 시행규칙과 등록규칙을 제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원 수탈에 나섰다.


석탄생산량은 1920년 26만톤에서 1922년 31.7만톤, 1926년 68.3만톤, 1930년 88.4만톤, 1940년 643.8만톤, 1944년 744.9만톤으로 급속도로 늘어났다. 1941년에는 137.6만톤 수출도 했다.


주요 탄광은 1910년대는 평양광업소가 주도했다면, 1920년대부터는 아오지탄광이 주도했다. 아오지탄광 매장량은 150억톤으로, 남한 최대 탄광인 2억톤의 삼척탄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고 큰 규모이다.


광복 후 1950년 11월 1일 대한석탄공사가 자본금 1000만원, 9개 광업소를 보유하고 발족했다.



1950년 발족 후 석유파동 때 최전성기…이후 내리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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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월 26일 1차 석유파동 직후 대한석탄공사에서 대책 회의를 열고 있다. 사진=대한석탄공사 50년사

광복 후 1950년 5월 4일 대한석탄공사법이 공포되고, 11월 1일 드디어 대한석탄공사가 자본금 1000만원과 9개 광업소를 갖고 발족했다. 석탄 매장량의 90%가 매장돼 있는 북한과 휴전선으로 갈리면서 남한은 10% 매장에 의존해야 했다.


남한은 북한에서 공급되던 전력 공급이 끊기면서 에너지난에 허덕이게 됐다. 석탄공사의 가장 큰 임무는 국민들에게 안정적으로 연료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증산에 매진해 생산량은 1956년 100만톤, 1959년 200만톤, 1962년 300만톤, 1963년 400만톤을 돌파했고, 1966년 470만톤을 생산하면서 첫 자급자족을 이루게 됐다.


석탄공사의 당기순익도 크게 늘었다. 1957년 5780만원에서 1963년 1억4680만원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부실 민영탄광 인수, 생산량 감소 등으로 1966년 1억9764만원 순적자를 보이는 등 실적 악화가 시작됐다.


결국 석탄공사는 1967년 9월 경영합리화위위원회를 설치하고 경영혁신에 나섰다. 그럼에도 적자가 계속돼 1972년 누적적자가 약 100억원을 넘었다.


석탄공사는 적자 해결을 위해 생산계획을 420만톤으로 축소, 저질탄 생산 억제, 탄가 인상 등을 단행했다.


석탄공사는 1970년대 두 번의 석유파동으로 인해 제2의 도약에 나섰다. 1973년 석탄가격을 51.3%나 인상했으나, 판매량은 급증했다. 1974년 16억원, 1975년 23억원 역대 최대 흑자를 기록했다. 생산량도 1982년 500만톤, 1986년 522만톤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 기회가 석탄공사의 결정적 패착을 일으켰다. 석탄공사는 1974년말 발전 3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3년간 399억원 자금을 투자해 장비현대화 등을 통해 생산량을 연 950만톤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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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4일 강원도 삼척 도계지역 주민들이 폐광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대한석탄공사 50년사

하지만 1980년 한국가스공사가 설립되고 천연가스 공급이 본격화되면서 석탄공사는 구조조정기에 접어들게 됐다. 1987년에는 전체 가구의 87%가 연탄을 사용했으나, 10년 뒤인 1996년에는 5.6%로 매년 20~30%씩 감소했다.


결국 정부는 1987년 10월 석탄산업합리화 대책을 수립하고 1988년부터 한계탄광 통폐합에 나섰다. 정부는 비경제 탄광의 자율적 폐광을 유도하고, 대책으로 근로자에게 퇴직금의 75%, 2개월분의 임금, 1개월분의 위로금, 생활안정금, 구직활동비 등을 지급했다.


1988년 347개이던 탄광은 10년 만인 1996년 11개로 축소되고 6만8500명의 근로자는 1만명으로 줄었다.


석탄공사 마지막 임금협상 타결…도계광업소 폐광지원 대상 선정

현재 석탄공사에 남은 직원은 본사 50명을 비롯해 187명뿐이다. 석탄공사는 6월 말 도계광업소 폐광과 함께 전 직원을 해고하고, 공사 운영도 종료할 예정이다.


지난 20일에는 강원도 원주 본사에서 김규환 사장과 김기준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전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2025년 임협 타결식이 진행됐다.


김 사장은 “비록 시대적 변화에 따라 석탄 산업이 퇴장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끈 광부의 헌신과 땀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라며 “이 자리를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기억하자"고 말했다. 노조 역시 “마지막까지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켜준 사측에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한국광해광업공단(코미르)은 23일 2025년도 제1차 폐광심의위원회를 열고 석탄공사의 마지막 탄광인 도계광업소를 폐광지원 대상광산으로 선정했다.


황영식 코미르 사장은 “석탄공사 도계광업소 폐광에도 정부 비축과 산지 재고탄 230만t이 있어 연탄 수급에는 문제가 없을 전망"이라며 “퇴직자의 생활안정을 위해 폐광대책비와 조기폐광특별위로금을 신속히 지원하고 3년 동안의 자녀학자금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환경오염 개선을 위한 종합 복구대책을 차질 없이 수행하고 정부가 추진 중인 경제진흥사업 예비타당성조사 사업도 제때 통과되도록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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