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사태 이후 송전망 건설 막혀, 공기업·민간도 손 못 댄 난제
이재명 정부, 속도전 예고했지만 현실적 문제 수두룩 쉽지 않아
보상 강화, 주민이익공유, 민간참여 등 모든 방안 적극 동원해야
▲2014년 6월 11일 오전 경남 밀양시청 직원들이 밀양시 부북면 장동마을 129번 송전탑 입구 진입로에 설치된 송전탑 반대 주민들이 설치한 비닐하우스형 움막을 철거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이 AI·반도체 3대 강국 도약을 선언하면서, 그 핵심 인프라인 '에너지 고속도로'(초고압직류송전망, HVDC) 구축 사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이 사업은 문재인·윤석열 정부 모두 추진 의지를 밝혔음에도 속도를 내지 못한 대표적 난제로 꼽힌다.
핵심 원인은 분명하다. 송전선로가 지나는 경과지 주민들의 반발이다. 특히 2014년 밀양 송전탑 사태 이후 사실상 모든 건설이 멈춘 상태다.
'송전탑은 들어오면 평생 고통만 남는다'는 인식이 뿌리 깊고, 환경·경관 훼손, 전자파 우려, 재산가치 하락 등으로 민원과 소송이 반복돼왔다.
문재인 정부 시절 “전력망 확충 조기 착공"이 국정과제로 포함됐지만, 실제 사업은 대부분 타당성 조사 단계에서 멈췄다.
윤석열 정부 역시 “AI 시대 대비 전국 송전망 확충"을 강조했으나, 한국전력공사(한전)의 재정 악화와 주민 반발로 인해 진척이 없었다.
정부는 전문가들이 제안한 민간참여 모델이나 특수목적법인(SPC) 방식 도입에도 소극적이었다.
결국 “정부는 추진 의지만 있고, 한전은 여력도 명분도 없으며, 주민은 끝까지 반대하는 구조"가 굳어졌다.
이재명 정부, '속도전' 예고…이번엔 다를까, 결국 주민수용성이 관건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AI 산업과 재생에너지 확산을 뒷받침할 송전망 인프라 확충이 시급하다"고 강조하며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을 '국가 전략 인프라 프로젝트'로 격상시켰다.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한전의 단독 추진 구조를 개편해 민간 발전사·투자기관이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 송전망 사업 구조'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법적 근거가 명확치 않아, 실제 민간 참여가 가능하려면 전기사업법 및 송전특례제도 개정이 필요하다.
결국 이번 정부가 속도를 내기 위해선, 정치적 결단과 사회적 설득이라는 두 축을 동시에 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대규모 전력망 건설은 단순한 기술·재정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송전망 건설에 속도를 내기 위해선 결국 '주민수용성(Community Acceptance)'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2014년 밀양 송전탑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전이 밀양지역에 송전탑 52기 설치에 나서자 일부 주민들과 환경·시민단체들이 건설 반대시위를 벌였다. 반대시위가 격해지면서 경찰과 격한 상황까지 벌어졌고, 주민이 자살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주민수용성을 해결하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은 세 가지로 꼽힌다.
직접보상 강화로 토지보상 외에도 발전이익 일부를 지역 주민에게 배분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방안이다.
기부채납 방식도 있다. 송전설비 경과지 주민이 원하는 공공시설(체육관, 도서관, 의료시설 등)을 송전사업자 측이 제공하는 방식이다.
주민 참여형 모델 도입도 검토할만 하다. 주민들이 송전망 운영 수익 일부를 배당받는 '에너지 협동조합형 구조'를 추진하는 것이다.
이같은 방식들은 이미 해외에서는 여러차례 적용된 바 있다. 독일·덴마크 등은 대규모 송전선 건설 시 지역주민이 일정 비율의 지분을 보유하게 하여, '피해의 당사자'에서 '이익의 주체'로 전환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
국내에서도 전남 신안, 경북 영천 등 일부 지역에서 주민참여형 태양광·풍력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둔 사례가 있다.
송전망도 이와 유사한 '이익공유형 모델'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견해다.
한전의 한계, 민간 개방이 답일까
한전은 이미 부채비율이 200%를 넘어서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송전망 사업을 추진할 여력도, 정치적 리스크를 감당할 이유도 없다"고 토로한다.
한전 내부에서도 “정부 정책은 속도전을 외치지만, 정작 실행 주체에게는 수단도 책임도 불분명하다"는 불만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송전망 사업을 민간에 개방해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된다.
통신망이나 철도처럼 일정 기준을 충족한 민간 사업자가 송전선 건설·운영을 맡고, 정부와 한전이 이를 감독하는 구조다.
그러나 정부는 '국가 기반망의 민영화 논란'을 우려해 아직까지 문을 열지 않고 있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기술도, 예산도 아닌 사회적 수용성이다.
AI·데이터센터·반도체 산업이 전력 대전환기를 맞이한 지금, 송전망 확충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한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송전탑이 아니라, 신뢰의 탑을 먼저 세워야 할 때"라며 이재명 정부가 과거 정부들이 넘지 못한 '주민의 벽'을 넘는다면 '에너지 고속도로'를 통한 AI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