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다자외교의 장에서 재부상한 원자력과 한국의 역할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5.12.02 10:58

임은정 공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임은정 공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임은정 공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올가을 한국 외교는 '중견국 외교'라는 표현이 공허한 수사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우선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한국이 단순한 개최국을 넘어 지역 질서의 의제를 설정하는 국가로 부상했음을 상징했다. 이어서 이재명 대통령이 남아프리가공화국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 참석하고, 이를 계기로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튀르키예까지 중동·아프리카 지역을 순방한 것은 한국 외교가 다자외교의 주변부가 아니라 구조를 설계하려는 행위자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장기화하는 전쟁과 서방 대 러시아 간 대결, 미·중 전략 경쟁의 심화, 미국의 일방주의 등으로 인해 국제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운 가운데, 양 진영 어느 쪽과도 대립하지 않고, 나아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도 역사적 부채 없이 협력할 수 있는 한국의 외교적 공간은 오히려 넓어지고 있다.


또한 잇따른 다자 외교의 중심에 에너지가 주요 의제로 거론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후변화와 유럽과 중동에서의 전쟁, 제재와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진행되는 시대에 에너지는 산업정책적인 측면에 더해 경제안보, 나아가 국가안보와도 직결되는 사안으로 여겨지며 국제질서 재편의 국면에서 핵심적인 의제로 다뤄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의제 설정의 변화가 아니라, 국제질서를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가 재정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G20 요하네스버그 선언은 개발도상국의 부채 문제와 기후 재난, 에너지 전환을 더 이상 주변 의제가 아닌 글로벌 거버넌스의 중심 과제로 격상시켰다. 앞서 경주 APEC 선언 역시 '연결·혁신·번영'이라는 주제 아래 공급망 재편과 기술 주권, 디지털 전환을 지역 협력의 핵심 언어로 공식화했다. 서로 다른 무대에서 채택되었지만, 두 선언은 모두 공통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국제질서의 재편에 있어 핵심적인 기제가 되는 것은, AI로 대변되는 미래 기술과 이를 뒷받침할 에너지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원자력이 있다.


이 맥락에서 이번 대통령 순방이 이집트와 튀르키예를 포함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 국가는 모두 러시아와 깊이 얽힌 원자력 협력 구조를 형성해 온 대표적인 국가들이다. 튀르키예는 러시아 국영기업 로사톰이 주도한 아쿠유 원전 프로젝트를 통해 운영·연료·유지보수까지 러시아에 구조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이집트 역시 엘다바 원전 사업을 통해 러시아 중심의 원자력 공급망과 금융 구조에 편입돼 있다. 원자력은 건설, 운영, 폐로까지 전 주기를 고려하면 수십 년 단위의 장기 관계를 전제로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세대(世代)에 걸친 협력 구조를 형성한다. 수출 통제는 물론 연료 공급과 사용후핵연료의 처리 문제는 핵 비확산과 직결되는 문제이니만큼, 어느 나라와 원자력 협력을 맺느냐는 지정학적 판단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고무적인 것은 이번 이재명 대통령의 순방에서 튀르키예나 이집트가 모두 한국과의 원자력 협력에 관심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에너지 협력을 넘어, 장기적인 전략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튀르키예 방문에서는 구체적인 성과도 있었다. 한국과 튀르키예는 정상회담을 계기로 원자력 분야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고, 규제·부지 평가·사업모델·기술 협력 등을 포괄하는 공동 작업 구조를 구축하는 데 합의했다. 이는 단순한 경제협력을 넘어, 튀르키예가 한국을 러시아에 의존적인 구조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지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집트와의 정상외교에서는 원자력 협력이 주요 의제 중 하나로 거론되었으나, 사업 계약이나 협약 체결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집트 역시 원자력 분야에서의 러시아의 대안을 탐색하고 있으며, 한국을 현실적인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확인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 가진 강점은 분명하다. 군사적 패권국도 아니고, 과거 식민 지배와 같은 역사적 부채도 없다. 기술 표준과 안전 문화를 국제 규범에 맞게 축적해 왔고, 원전 운영과 건설 경험을 동시에 보유한 몇 안 되는 국가다. 경주 APEC이 강조한 '연결·혁신·번영'은 원자력 분야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원자력을 단순한 수출 산업으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외교·안보·기후 전략을 연결하는 전략 자산으로 스스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이 분야에서 준비가 되어 있는 거의 유일한 중견국이다. 더 늦기 전에 이 역량을 전략으로 전환하고, 실행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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