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전 당나라 몰락 숨은 원인 과학으로 규명
나무와 동굴에 남긴 흔적과 기록으로 옛기후 복원
재배하던 조를 쌀·밀로 바꾼 게 기후 피해 낳아
육로의 사막화와 수로의 마비라는 ‘이중 타격’
북방 요새로 군량비 제때 못 보내 군사반란 초래
▲서기 848년 장의조(張議潮) 장군이 티베트 제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한 당 말기(晚唐)의 벽화 — 둔황 모가오 석굴 제156굴에 남아 있는 작품.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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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제국(帝國)이 무너질 때, 우리는 흔히 인간의 어리석은 선택을 떠올린다. 부패한 정치, 무능한 황제, 통제되지 않은 반란군이 역사의 주범처럼 등장한다. 그러나 최근 과학자들은 당나라의 멸망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시 읽어냈다. 이 제국을 서서히 붕괴시킨 것은 사람보다 먼저 기후의 변화였다는 결론이다.
스위스 바젤대학교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중국과학원과 란저우대학교 등 국제연구팀은 최근 '커뮤니케이션스 지구와 환경(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중국 당나라가 서기 907년에 막을 내리는 데 기후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했다.
◇황허 루프, 제국의 심장이 흔들리다
기후 과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1200년 전 당나라 당시(서기 800~907년)의 기후 변화를 복원했다. 그 결과, 당시 중국에서도 황허가 말굽 모양으로 크게 굽이치는 황허(黃河) 루프 지역에 가장 치명적으로 작용한 것을 확인했다.
황허 루프(loop) 지역은 주로 내몽골 자치구 남서부와 닝샤(寧夏)·산시(陝西) 북부 일부를 포함한다. 황허의 물에 의존하는 관개 농업 덕분에 중국 북부 내륙에서 드물게 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가 형성돼 예로부터 '사막 속의 곡창'이라 불리기도 했다. 황허 루프 지역은 중국 역사에서 농경 문명과 유목 문화가 맞부딪히는 경계 공간이기도 했다. 흉노·선비·돌궐 등 북방 세력이 중국 농경 지역으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당나라가 북방 방어를 위해 군대와 곡물을 집중 배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동시에 농업 생산과 군량 공급의 핵심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후는 이 지역에 가혹했다. 장기간 가뭄이 이어지다 갑작스러운 집중호우가 발생했고, 황허는 잦은 범람으로 농경지와 군사 시설을 동시에 파괴했다.
연구진이 재구성한 수문 지표에 따르면,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이 지역은 '평균적인 해'보다 극단적인 해가 훨씬 많아진 시기였다.
기후 변화는 농업 구조의 변화와 맞물리며 위기를 증폭시켰다. 당나라는 오랫동안 가뭄에 강한 조를 재배해 왔지만, 점차 밀과 쌀 중심의 농업으로 이동했다. 당나라는 원래 가뭄에 강한 조 중심의 농업 체계를 유지해 왔으나, 제국이 확장되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더 높은 수익과 수확량을 보장하는 밀과 쌀로 주곡을 점차 전환했다. 특히 도시 인구의 밀도를 지탱하고 제국의 팽창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모작 등 집약적 농업을 선택했다.
하지만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기온이 낮아지고 건조해지는 기후 변화가 닥치자 이 선택은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왔다. 밀과 쌀은 조에 비해 물 부족에 훨씬 취약했고, 기후 변화에 따른 수확량 감소와 기근을 견뎌내지 못했다. 결국,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농업 전략이 식량 체계 전체의 회복력을 떨어뜨리는 '잘못된 선택'이 된 것이다.
▲논문 연구대상 지역의 지형(A), 연구 범위(B), 연평균 기온(C), 연평균 강수량(D). 황허 sim은 지형 자료를 기반으로 한 황허 본류의 모의 경로를 나타내며, 황허 NE(Natural Earth)는 강 중심선 데이터셋(naturalearthdata.com)에 따라 강 유로를 나타낸 것이다. 점선은 연강수량 400 mm 등우선(isohyet)을 나타낸다. 이는 농경–유목 전이지대의 남쪽 경계를 설정하는 기준으로 간주되며, 중국에서 동아시아 여름몬순(EASM)의 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자료=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 2026)
◇북방 전선의 식량 부족과 장거리 보급의 한계
연구진은 복원된 기후 데이터를 바탕으로 당시 농업 생산성을 추정했다. 그 결과,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던 시기에는 곡물 생산량이 급격히 줄었고, 특히 북방 군사 거점으로 보낼 수 있는 잉여 식량이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나라는 북방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수만 명의 병사를 수용하는 대규모 요새와 관리 센터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자연적으로 강수량이 적고 기후가 불안정해 자체적인 식량 생산만으로는 군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북방 군사 기지(진무군, 천덕군 등)는 식량의 약 80%를 외부에 의존했다.
이에 따라 곡물은 제국의 중심지인 황허 동부와 남동부 유역에서 수집돼 태원이나 성주 같은 중간 허브를 거쳐 수백 ㎞ 떨어진 전방으로 운송됐다.
연구팀은 과거 기후 데이터를 기반으로 당시 보급로의 취약성을 모델링했다. 기후 변화는 단순한 식량 부족을 넘어, 식량을 실어 나를 네트워크 자체를 무력화시켰다. 건조한 시기가 지속되자 북방의 초원과 반건조 지역(무우스 사막 주변 등)은 물과 가축용 사료가 부족해졌다. 이는 운송용 말과 소, 그리고 사람의 생존을 위협해 육상 보급로를 사실상 고립시켰다.
역설적으로 가뭄 기간 중에도 발생하는 급격한 홍수는 하천 기반의 운송 시스템을 마비시켰다. 강물이 불어나면 강을 건너거나 배를 이용한 운송이 불가능해졌고, 주요 교차로와 보급 기지들이 침수되거나 파괴됐다.
연구팀은 53개의 환경 응답 구간(bin)을 설정하고, 각 기후 조건에서 보급망이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최소 비용 경로(LCP)'와 '네트워크 분석' 기법으로 시뮬레이션했다. 분석 결과, 기후 스트레스가 심해질수록 보급 경로의 이동 시간과 에너지 소모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특정 보급로가 기후로 인해 단절될 경우, 대체 경로를 찾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제국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보급망의 일부가 끊어질 경우 전체 군사 체계가 무너질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식량 공급망이 무너진 북방 지역의 군대와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각자도생의 길을 선택했다. 중앙 정부로부터 식량 보급이 끊기자, 현지의 지휘관(번진)들은 스스로 행정·재정·군사 권한을 장악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식량난으로 고통받는 농민들과 급료를 받지 못한 병사들은 쉽게 반란의 주체가 됐다. 884년 황소의 난과 같은 거대한 사회적 혼란은 이러한 경제적·환경적 기반의 붕괴 위에서 폭발했으며, 결국 907년 당나라의 최종적인 멸망으로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당나라는 기후에 맞지 않는 작물을 선택함으로써 식량 체계를 스스로 취약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기후 변화라는 외부 압력이 가해졌을 때 제국의 생명선인 보급망이 버티지 못하고 끊어지며 몰락하게 된 것이다.
◇1200년 전의 기온과 강수량 어떻게 파악했나
연구팀은 1200년 전의 기후를 복원하기 위해 '고기후 프록시(proxy)'라 불리는 세 가지 핵심 자연 기록을 활용했다.
먼저 동굴 석순 기록을 분석해 과거 따뜻한 계절의 연간 기온 변화를 추정했고, 꽃가루 데이터를 통해 동아시아 여름 몬순의 강도와 연평균 강수량을 재구성했다. 석순은 빗물이 동굴로 스며들며 미네랄이 쌓여 만들어지는데, 그 안에는 당시 강수량과 기온 조건이 산소 동위원소 형태로 기록된다. 석순 자료는 9세기 이후 북중국 지역에서 여름 몬순이 약화되며 강수 변동성이 커졌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비가 오더라도 일정하지 않았고, 한 번에 쏟아지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의미다.
또한, 황하 상류 지역의 나무 나이테 기록은 수 세기에 걸친 강물 유출량의 역동적인 변화를 파악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활용됐다. 나무는 해마다 성장 흔적을 남기는데, 비가 충분하고 기온이 온화하면 나이테가 넓어지고, 가뭄이 들거나 추워지면 얇아진다. 수백 년치 나이테 자료를 분석한 결과, 9세기 들어 이 지역의 토양 수분이 급격히 줄어들었음이 드러났다. 이는 단순히 비가 적게 온 것이 아니라, 강수와 증발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뜻이었다.
▲'대리지표'를 기반으로 재구성한 중국 북동부의 기후 및 환경 변화. A는 동굴 석순 기록에서 도출한 베이징 지역의 연간 온난 계절 기온 재구성값. B는 자연 꽃가루 자료에 기반해 재구성한 중국 북동부의 연평균 강수량. C는 꽃가루 자료를 이용해 재구성한 동아시아 여름몬순(EASM) 강수량. D는 상류 지역의 나이테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서기 800–1900년 기간의 황허 유출량 변동. E는 서기 800–907/908년 기간의 황허 유출량 재구성 결과. (자료=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 2026)
여기에 1500회 이상의 홍수 사건이 기록된 역사 문헌 데이터를 더해 기상 재구성의 정확도를 높였다. 『구당서』와 『신당서』 같은 사서에 등장하는 가뭄·홍수·흉년 기록을 연대별로 정리해 과학 자료와 대조했다. 그 결과, 나이테와 석순이 가리키는 기후 악화 시기와 실제 사회적 재난 기록이 놀라울 정도로 겹쳐졌다. 자연과 인간의 기록이 같은 방향을 가리킨 것이다.
연구팀은 이러한 데이터 수집을 넘어 현대의 공간 분석 기술(GIS)과 통계 소프트웨어(R)를 결합한 '다구성 요소 모델'을 구축했다. 연구팀은 800~907년을 데이터 변동성에 따라 53개의 환경 응답 구간(bin)으로 정밀하게 나눴다.
특히 강수량뿐만 아니라 증발산으로 인한 수분 손실까지 고려하는 표준 강수 증발산 지수(SPEI)를 활용해 당시 특정 지역이 겪었을 가뭄의 정도를 시뮬레이션했다. 이를 통해 당나라의 주요 도시와 군사 기지가 가뭄과 홍수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보여주는 '수문기후 취약성 지도'가 완성됐다.
모델 시뮬레이션 결과, 식량 자급이 불가능해진 북방 군사 지역은 먼 거리의 식량 공급망에 의존하게 되었으나 잦은 홍수와 가뭄으로 인해 이 공급망마저 끊기면서 사회적 혼란과 왕조의 몰락이 가속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연구는 고기후 데이터와 최신 공간 모델링 기법의 결합이 역사적 대전환의 원인을 밝히는 데 얼마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같은 시대, 신라도 비슷한 시험대에 올랐다
서기 859~873년 당시 당나라는 전국적 자연재해와 기근에 시달렸다. 황하 범람과 가뭄이 반복되며 농민층의 생존 기반이 붕괴됐고, 이는 대규모 민란의 토양이 됐다.
특히, 874년 황소의 난이 발생했다. 소금 밀매상 출신 황소가 주도한 대규모 농민 반란이다. 반란군은 남중국에서 북상해 880년 당 수도인 장안이 함락됐다. 884년 황소의 난이 진압됐지만, 반란을 진압한 군벌의 세력이 확대됐다.
▲황소. (자료=위키피디아)
888~904년에는 절도사 군벌 간 내전이 격화됐고, 황제는 군벌을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군벌의 보호 아래 전전해야 했다. 904년 군벌 주전충이 황제를 살해하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긴 데 이어 907년에는 주전충이 마지막 황제 애제를 폐위하고 후량(後梁)을 건국하면서 당은 멸망에 이르렀다.
이러한 흐름은 한반도 신라와도 겹친다. 9세기 신라는 잦은 흉년과 자연재해 속에서 지방 세력이 성장했고, 중앙의 통제력은 약화됐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가뭄과 홍수, 기근은 이 시기가 단순한 정치 혼란기가 아니라, 환경적 압력이 누적된 시기였음을 시사한다.
860년대 이후 자연재해와 세금 부담으로 인해 농민 봉기가 빈발했고, 지방 군사력을 장악한 호족 세력이 독자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889년 원종·애노의 난 이후 각지에서 반란과 자치 움직임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900년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에는 궁예가 후고구려(마진)을 세우면서 한반도는 후삼국 구도로 본격 진입하게 된다. 당이 멸망한 907년 무렵에는 통일신라가 사실상 국가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935년 경순왕의 항복으로 통일신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된다.
이처럼 당나라와 통일신라는 서로 다른 제국이었지만, 같은 기후 체계 안에 놓여 있었다. 기후 변화는 국경을 가리지 않았던 셈이다.
◇재난 견딜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중요
연구팀은 “이번 연구는 고해상도 기후 데이터를 공간 모델링 기법과 통합, 중국의 수문기후 변화가 사회정치적 변혁에 어떻게 기여했는를 규명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복합 다성분 모델을 통해 기후변화와 환경적 반응, 사회정치적 발전 간의 다양한 상호작용과 연관성을 살펴본 것이다.
이 연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환경적 문제들이 사회 불안정에 기여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사회의 실패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이다.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단 한 번의 재난이 아니라, 재난을 견디지 못하게 만든 구조적 선택의 누적이었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 자체보다 더 위험한 것은, 변화에 맞지 않는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일이었다.
과학자들이 나무와 동굴, 기록을 통해 되살려낸 1000년 전의 기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후는 항상 변해왔지만, 그 변화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역사를 갈랐다"고.
연구팀은 “당나라 말기라는 특정 시기만을 대상으로 한 이번 연구는 유사한 생태적 환경이 다른 사회정치적 시스템에 유사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 같은 기후 영향권에 있던 통일신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났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도 있다. 당나라의 몰락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기후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을 향한 오래된 경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