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기금화와 공적 역할 강화’ 토론회
국민연금만으로 부족한 노후자금…퇴직연금 기금화 대안으로
낮은 수익률·개인 책임 구조 한계…기금형 도입 논의 본격화
노사정TF 도입 필요성 공감…운영 주체 두고 의견 엇갈려
▲크레이씨(CRAiSEE)
퇴직연금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대안으로 '기금형 퇴직연금'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500조원을 넘어섰지만, 수익률은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해 노후소득보장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퇴직연금 수익률을 제고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고, 기금화는 그 대안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노사정과 여당 모두 퇴직연금 개편 필요성에 공감하는 가운데, 퇴직연금을 어떻게 기금으로 모아, 누가, 어떤 원칙으로 운용할 것인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연금개혁특위와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공동 주최한 '퇴직연금 기금화의 공적 역할 강화 방안' 토론회에서도 이러한 쟁점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퇴직연금 기금화의 공적 역할 강화 방안' 토론회의 참석자들 [사진=최태현 기자]
국민연금만으로는 부족한 노후, 퇴직연금에 쏠리는 시선
한국 노후소득보장체계는 흔히 '3층 구조'로 설명한다. 1층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같은 공적연금, 2층은 퇴직연금, 3층은 개인연금과 자산이다. 이 가운데 핵심 축은 국민연금이지만, 현실적으로 국민연금만으로 은퇴 후 생활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동시에 받는 노인은 약 342만명이다. 이 가운데 10명 중 8명은 최저 생계비인 76만5000원보다 적게 받는다. 국민연금공단 연구에 따르면, 노년기에 기본적인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월 14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 매달 연금이 나와도 '보름을 못간다'는 말이 반복되는 이유다.
특히 월급을 받고 일해 온 대다수 근로자에게 은퇴 후 가장 큰 문제는 '소득 공백'이다. 이 공백을 메울 수단으로 퇴직연금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퇴직연금은 이름 그대로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적립해 노후에 연금으로 받도록 만든 제도다. 현실은 연금 역할을 하지 못 하고 있다. 상당수 근로자는 퇴직연금을 연금으로 받기보다 퇴직 시 일시금으로 받는다.
정창률 단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퇴직연금을 '깨진 기둥'으로 표현했다. 정 교수는 “퇴직연금 제도가 노후소득보장 제도로서 제 역할을 거의 못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500조원 쌓였지만 수익률은 2%…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퇴직연금 적립금 추이
퇴직연금 적립금은 매년 약 10%씩 증가해 지난해 말 기준 500조원 돌파를 눈앞에 뒀다. 하지만 연 평균 수익률은 2% 안팎에 머물고 있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 수익은 사실상 제자리거나 마이너스다.
가장 큰 원인은 퇴직연금 자금의 약 75%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안정성은 높지만 수익은 낮은 구조다. 투자 성과에 따라 수익이 달라지는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은 25% 수준에 그친다.
퇴직연금이 개인과 기업 단위로 쪼개져 있어 전문적인 자산 배분이 어렵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근로자가 직접 투자 상품을 선택해야 하는 구조에서는 '가입만 해두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구조를 바꾸기 위해 퇴직연금을 기금으로 모아 전문기관이 운용하는 '기금형 퇴직연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러 사람의 자금을 모아 운용하면 투자 대상을 다양하게 나눌 수 있고, 규모가 커질수록 운용 비용을 낮출 수 있어 장기적으로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기금화는 합의, 쟁점은 '누가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퇴직연금 기금화 논의는 정부와 정치권에서 진행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TF'에서는 퇴직연금 도입 의무화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라는 두 가지 쟁점을 놓고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노사정 모두 제도 도입 방향에는 일정 부분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퇴직연금 도입 의무화는 기업이 퇴직 시점에 한꺼번에 부담하는 기존 퇴직금 제도와 달리, 근무 기간 동안 일정 금액을 사외에 적립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의무적으로 적립한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대안으로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함께 논의되고 있다.
TF에서 검토 중인 기금형 모델은 30인 미만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공적 퇴직연금 제도인 '푸른씨앗'과 유사하다. 가입자가 아니라 특정 운영 주체가 사용자 부담금을 모아 공동의 기금을 만들고, 이를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방식이다. 기금형이 도입되더라도 근로자의 선택권은 유지된다. 확정급여(DB)형을 유지할 수도 있고, 확정기여(DC)형 근로자는 여러 운용 옵션 중 기금형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다만 기금을 누가 운용할 것인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국회에는 △국민연금공단이 기금형 퇴직연금 사업자로 참여하는 안(한정애 의원) △국민연금과 유사한 퇴직연금공단을 새로 만드는 안(박홍배·안호영 의원) △전담 운용사를 선별적으로 인·허가하는 안(안도걸 의원) 등이 제시돼 있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시장서 '메기 역할'" vs “국민연금 참여는 시기상조"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퇴직연금 기금화의 공적 역할 강화 방안'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사진=최태현 기자]
구체적인 운영 방식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했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시장에서 '메기 역할'을 하길 원한다"며 “기존 사업자들과 경쟁을 통해 비용을 낮추고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공단이 참여할 경우 현재 사업자 수수료의 3분의 1, 수익률은 3배도 가능하다"고 했다.
정창률 교수는 기금형 퇴직연금이 기존 제도를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선택지를 하나 더 추가하는 구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옵션'을 추가하는 방식"이라며 “안정성을 중시하는 기업이나 근로자는 기존 계약형을 유지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즉, 모든 근로자를 일괄적으로 기금형으로 전환하기보다, 기금형을 하나의 선택 가능한 제도로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일부에서는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 기금 운용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지만, 정 교수는 이에 대해 “아직 기금형 퇴직연금이 제도적으로 안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곧바로 국민연금 참여를 논의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그는 “먼저 민간이나 중소 규모 기금을 중심으로 기금형을 안정화한 뒤, 그래도 수익률이 낮거나 문제가 지속된다면 그때 국민연금 참여를 검토해도 늦지 않다"고 덧붙였다.
특히 정 교수는 단순히 금융기관에 맡기는 방식은 '이름만 기금형'이 될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기존 계약형과 마찬가지로 금융기관이 실질적인 결정권을 쥐게 되면, 기금형의 취지가 퇴색된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기금형이 작동하려면 영리·비영리를 떠나 독립된 수탁법인을 만들어 운영과 책임 구조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보다 적극적인 공적 참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영리형 기금은 기존 계약형과 큰 차별성이 없다"며 비영리 연합형 기금을 우선 도입해 안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연금공단의 참여 가능성에 대해서는 “현재 근로복지공단도 사실상 중소기업의 퇴직연금 자금을 모아 금융기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국민연금공단이 참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설명했다.
남 교수는 노사 참여형 구조도 제안했다. 노사가 함께 참여하는 연합형 기금을 만들되, 운영과 운용을 분리하자는 구상이다. 운영은 노사 동수로 구성된 이사회가 맡고, 실제 투자 운용은 전문성을 갖춘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위탁하는 방식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직접 자산을 운용하기에는 역량과 경험이 부족할 수 있다는 현실을 고려한 대안이다.
실제 노사정 TF에서도 유사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TF에서는 기금형을 전면 도입하기보다, 일정 유형에 한해 계약형과 병행 선택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노사가 함께 운영하는 '연합형 기금'과 금융기관이 중심이 되는 '금융기관형 기금'으로 나누는 방식이다. 연합형 기금은 이사회를 노사 동수로 구성하고, 금융기관형 기금은 독립이사가 과반을 차지하되 노동계 추천 전문가를 일정 비율 포함하는 구조가 논의되고 있다.
“사유재산을 정부 '쌈짓돈'처럼 활용"…기금형 퇴직연금 둘러싼 오해
정부가 추진하는 퇴직연금 기금화를 둘러싸고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사실상 후불임금이자 사유재산인 퇴직금이 기금화되면 정부가 쥐락펴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1월 12일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는 '퇴직연금 기금화 추진을 반대한다'는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퇴직연금은 근로자가 평생 일한 대가로 적립한 개인의 사적 재산"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금화는 개인의 운용 권한을 제한하고, 운용 실패 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퇴직연금 운용을 하나의 기금으로 집중시키는 것은 정치적·정책적 개입 위험을 높이고, 한 번의 판단 오류가 수많은 국민의 노후 생활에 직접적인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퇴직연금 기금화 추진 즉각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김동진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금 논의되고 있는 퇴직연금 기금화의 방향은 공적 기관의 기금으로 일원화가 아니라 기금을 정부가 마음대로 운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며 “계약형과 기금형이 공존하고 공적 기관 이외에도 노사가 공동으로 설립하는 기금, 다른 형태의 기금도 모두 공존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