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정부가 2분기의 전기요금을 동결한다. 지난 2월 말 중동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연료비 조정단가에 적지 않은 인하 요인이 발생했지만, 그동안 누적된 미(未)조정액을 고려해서 전기요금에는 반영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200조 원이 넘는 무거운 부채를 떠안고 있는 한전의 재무 상황과 중동발 에너지·공급망 위기에 의한 불확실성을 걱정하는 이재명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도 고려했을 것이다.
전기요금이 12개 분기 연속해서 동결되는 주택용과 일반용(업무용) 소비자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그렇지 않아도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에 떨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마냥 반가워할 수는 없다. 중동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비 억제'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철의 냉방용 전력 수요를 줄이기 위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으면 여름철 전력 대란을 피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전력 소비의 55%를 차지하는 산업용 전기를 사용하는 산업계의 입장도 난처하다. 지난 정부에서 무려 73%나 올려놓은 산업용 전기요금 때문에 고사(枯死)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 기업의 현실이다. 산업용 전기요금은 kWh당 179.23원으로 급전(給電)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들고, 소비량도 적은 주택용 155.52원보다 15%나 더 비싸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해괴망측한 비정상이고, 심각한 불공정이다.
지난 정부의 포퓰리즘이 만들어낸 끔찍한 일이다. 문재인 정부가 남겨놓은 탈원전 비용을 몽땅 산업용 전기요금에 떠넘겨 버렸다. 주택용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반발을 피하겠다는 꼼수가 뒤늦게 제조업과 인공지능을 위협하는 폭탄을 만들어낸 것이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비싼 전기요금 탓에 철강 공장은 조업 시간을 줄이고 있고, 염색 공장은 상당한 물량을 중국에 빼앗기고 있다. 중국과 중동의 과잉 투자로 발생한 전 세계적인 공급 과잉에 시달리고 있는 석유화학산업계의 현실이 가장 절박하다. 작년 8월부터 시작했던 '자율 구조조정'도 이번 중동 위기로 길을 잃어버린 상황이다.
미래 산업도 흔들린다. 인공지능(AI) 3대 강국을 위해 100조 원을 투자하고 반도체 2대 강국을 위해 700조 원을 투입하겠다는 단군 이래 최대의 국정과제도 위험한 상황이다. 네이버·카카오·KT 등 빅3 IT기업이 데이터센터 가동에 사용한 전력은 지난 5년 사이에 75%가 증가했는데 전기요금은 2배가 넘는 156%나 폭등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앞으로 들어서게 될 데이터센터가 과연 살인적인 전기요금을 견뎌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엎친 데 덮친다고 4월부터는 산업용 전기요금의 부과 체계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1977년 이후 49년 만의 대규모 개편이다. 가장 비싼 요금을 부과하는 '최대부하' 시간대를 낮에서 저녁·밤으로 옮긴다. 태양광·풍력 전기가 남아도는 낮 시간대 전력 소비를 유도하고, 전기요금을 깎아주던 심야 요금은 오히려 인상한다. 산업용 전력의 수요를 분산해서 전력망의 부하를 낮추고, 산업 현장의 전력 소비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번 조치로 4만여 곳의 산업용(을) 사업장 중 97%인 3만8000여 곳에 요금 인하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개편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심야의 작업을 주간으로 옮기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 년 365일 연속 가동이 필요한 정유·석유화학·철강·반도체 업체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이번 개편으로 한전은 연간 5000억 원의 수입이 줄어들게 된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태양광·풍력의 전기가 남아도는 것은 짧은 봄·가을에 한정된 일이다. 결국 태양의 일조량이 줄어드는 겨울이나 장마가 길어지는 여름에는 가격이 불안정한 LNG 발전을 더 많이 동원할 수밖에 없다. 이번 기회에 재생에너지를 늘이자는 주장도 조심스러운 것이다. 태양광·풍력 설비가 늘어나면 어쩔 수 없이 LNG 발전량도 늘어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산업용 전기요금은 기업주가 개인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업의 전기요금은 고스란히 제품의 원가에 반영되어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가고, 결과적으로는 기업의 경쟁력을 깎아 먹게 만든다. 기업이 전기를 물 쓰듯 펑펑 낭비하고 있다는 일부 언론의 지적도 억지일 수밖에 없다. 제품 원가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전기를 함부로 낭비하는 기업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 위기가 아니라도 주택용·일반용 전기의 낭비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