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언 우석대 ESG 국가정책연구소 소장
미국의 압박과 EU의 재조정, 한국이 선택해야 할 ‘데이터 실용주의’
▲이창언 우석대학교 ESG 국가정책연구소 소장
최근 글로벌 ESG 뉴스를 보면 묘한 착시가 생긴다. 미국이 유럽연합(EU)의 지속가능성 규제를 강하게 문제 삼고, EU도 기업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규제를 손질하면서 마치 'ESG의 시대가 끝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과 자본시장의 실제 흐름은 다르다. 규제의 범위와 강도는 조정되고 있지만 기업의 기후·인권·공급망 정보를 표준화하고 검증 가능한 투자정보로 만들려는 방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 규제 후퇴가 아닌 '재조정'의 시간
논쟁의 중심에는 EU의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이 있다. CSRD는 기업에 '착한 경영'을 권고하는 캠페인이 아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이 환경·사회·거버넌스 정보를 유럽지속가능성보고기준(ESRS)에 따라 공시하도록 하는 법적 제도다.
기업이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반대로 기후·사회 문제가 기업의 재무에 미치는 영향을 각각 살피는 '이중 중대성(Double Materiality)'이 핵심이다. 공급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환경 위해를 예방하고 시정하도록 요구하는 기업지속가능성실사지침(CSDDD)과는 구별된다.
EU는 올해 두 제도를 모두 크게 손질했다. 지난 2월 EU 이사회가 최종 승인한 '옴니버스 I'에 따라 CSRD의 일반적인 적용범위는 종업원 1000명 초과이면서 연간 순매출 4억5000만 유로 초과 기업으로 좁아졌다. 반면 CSDDD는 종업원 5000명 초과, 연간 순매출 15억 유로 초과 기업으로 범위가 더욱 축소됐다. 두 기준은 명확히 다른 제도에 적용된다.
7월에는 EU 집행위원회가 개정 ESRS를 채택했다. 의무 데이터 항목을 60% 이상 줄이고 전체 데이터 항목도 70% 이상 축소해 기업의 보고 부담을 낮추는 방향이다. 그렇다고 CSRD가 폐기된 것은 아니다. ESRS에 따른 공시와 이중 중대성을 중심으로 한 기본 구조는 유지된다. 원칙의 폐기라기보다 경쟁력과 행정 부담을 고려한 '규제의 재조정'에 가깝다.
◇ 기계가 읽는 데이터로 진화하는 ESG
미국의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2025년 8월 미·EU 공동성명에는 CSRD와 CSDDD가 대서양 무역에 부당한 제약이 되지 않도록 EU가 노력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지난 8월 14일 앤드루 퍼즈더 주EU 미국대사는 이를 근거로 추가적인 규제 수정을 요구했고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EU 집행위원회는 협력 가능성은 열어두면서도 EU의 규제체계와 규제 자율성 자체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미국의 규제완화와 통상 압박이 강해졌다는 사실을 지속가능성 공시의 세계적 후퇴로 일반화할 근거는 아직 없다. IFRS재단에 따르면 40개가 넘는 관할권이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기준을 도입하거나 활용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EU도 지난 7월 유럽단일접근점(European Single Access Point·ESAP)의 1단계 정보 수집을 시작했다. 금융시장과 지속가능성 관련 공개정보를 단계적으로 통합하고 2027년 7월까지 일반 이용자에게 제공할 예정이다. ESG 정보가 기업이 발간하는 보고서 속 문장을 넘어 기계가 읽고 투자자와 금융기관이 비교·분석할 수 있는 '시장 데이터'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 한국의 해법은 '데이터 실용주의'
한국의 대응 역시 'EU식 규제를 그대로 이식할 것인가, 미국의 규제완화 기조를 따라갈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이어서는 안 된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7월 지속가능성 공시 제도화 최종안을 발표했다. 2028년 연결자산총액 10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부터 시작해 2029년에는 5조원 이상으로 확대하고, 2030년 2조원 이상 기업까지 확대할지는 시행 상황을 평가한 뒤 검토한다. 법정공시를 위해 자본시장법 개정도 추진한다. Scope 3 공시는 공시대상별로 3년의 준비기간을 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데이터 실용주의'다. 대기업에는 글로벌 자본시장과 호환되는 공시·검증 체계를 갖추도록 하되, 중소·중견기업에는 업종별 Scope 3 산정도구와 한 번의 입력으로 여러 원청기업에 대응할 수 있는 공동 데이터 인프라를 제공해야 한다. 정부가 2028년까지 주요 수출 15개 업종의 Scope 3 가이드라인과 1000개의 전과정목록데이터(LCI)를 구축하고, '단일 입력-다수 대응'을 지향하는 산업공급망 ESG 플랫폼을 추진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다.
ESG를 둘러싼 정치의 온도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탄소와 공급망, 인권과 기후위험 데이터가 기업의 비용과 시장 접근을 좌우하는 현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ESG 구호가 아니다. 국제 규제가 바뀌어도 통용되는 데이터와 검증 능력, 그리고 우리 산업구조에 맞는 실용적인 전환 전략이다.
* 이창언 우석대학교 미래융합대학 창업컨설팅학과 교수 / 우석대 일반대학원 ESG·공공정책학과 주임 교수 / 우석대 ESG 국가정책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