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개 언어 더빙·122개 협력사 동원
“AI는 보조 수단”…사람의 역할 강조
▲15일 서울에서 열린 넷플릭스·한국콘텐츠진흥원 '글로벌 로컬라이제이션 라운드테이블' 행사에서 캐서린 르타트 넷플릭스 글로벌 콘텐츠 로컬라이제이션 시니어 디렉터가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성과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김나현 기자
한국 드라마에서 여성이 남성을 부르는 '오빠'는 영어로 어떻게 옮겨야 할까. 단순히 'Brother'로 번역하면 등장인물의 관계와 감정이 달라질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 한국 콘텐츠를 보는 시청자가 늘면서 이처럼 대사 한마디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전달하는 자막과 더빙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15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로컬라이제이션 라운드테이블'에서는 K콘텐츠가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세계 시장으로 확산하는 과정이 소개됐다. 넷플릭스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공동으로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넷플릭스의 글로벌, 유럽·중동·아프리카(EMEA), 미국·캐나다(UCAN) 지역 현지화 책임자들이 참석했다.
캐서린 르타트 넷플릭스 글로벌 콘텐츠 로컬라이제이션 시니어 디렉터는 “로컬라이제이션(현지화)은 제2의 제작"이라며 “훌륭한 이야기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 콘텐츠가 세계 시장에서 흥행한 배경에는 각국의 언어와 문화에 맞춰 작품을 전달하는 현지화 작업이 있다는 설명이다.
◇ 더빙 한 언어에 60명…세계 122개 협력사 가동
▲15일 서울에서 열린 넷플릭스·한국콘텐츠진흥원 '글로벌 로컬라이제이션 라운드테이블'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콘텐츠 현지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달시 파켓 번역가, 산더르 반 데르 폴 넷플릭스 디렉터, 제니 로스 넷플릭스 디렉터, 존 드미타 넷플릭스 시니어 매니저. 사진=김나현 기자
넷플릭스는 현재 36개 언어로 더빙을, 33개 언어로 자막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캐나다, 유럽·중동·아프리카, 아시아·태평양, 중남미 등 4개 지역에서 총 122개 협력사와 더빙 및 자막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르타트 디렉터는 더빙 한 편을 한 언어로 제작하는 데 통상 50~60명이 참여한다고 설명했다. 성우와 번역가뿐 아니라 대본 각색가, 연출가, 음향 엔지니어, 품질 검수 담당자 등이 투입된다. 이를 10개 언어로 확대하면 약 500명이 참여하는 셈이다.
그는 “더빙은 결코 부수적인 작업이 아니다"라며 “참여자들의 이름을 모두 엔딩 크레딧에 올린다면 영화 한 편의 엔딩 크레딧만큼 길어질 것"이라고 했다.
국가별 시청 방식도 달랐다.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전통적으로 더빙을 선호하는 시장이다. 르타트 디렉터에 따르면 이들 국가에서는 전체 시청 시간의 75% 이상이 더빙 콘텐츠에서 발생한다. 반면 스웨덴과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는 원어 음성을 유지한 채 자막으로 감상하는 방식이 상대적으로 보편적이다.
산더르 반 데르 풀 넷플릭스 EMEA 콘텐츠 로컬라이제이션 디렉터는 최근 젊은 세대의 시청 습관 변화에도 주목했다.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영상을 보는 '멀티태스킹'이 늘면서 자막 선호 국가에서도 더빙 수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반 데르 풀 디렉터는 “시청자가 화면이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두더라도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며 “기존에 더빙을 제공하지 않았던 언어로 서비스를 확대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오빠'를 '오빠'로 번역한 이유…문화까지 옮긴다
▲영화 '가능한 사랑' 스틸컷. 사진=넷플릭스 제공
이날 행사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이 현지화 사례로 소개됐다. 넷플릭스는 오는 11월 6일 공개 예정인 이 작품에 32개 언어의 자막과 18개 언어의 더빙을 제공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 음성도 10개 언어로 제작했다.
영화의 영어 자막 번역을 맡은 달시 파켓 고려대 교수는 등장인물이 남편을 부르는 호칭을 번역하면서 겪었던 고민을 소개했다. 극중 한 여성이 다른 부부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모습을 신기하게 여기는 장면이다.
파켓 교수는 해당 대사를 직역하면 해외 시청자들이 한국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반드시 공손하게 말해야 한다고 오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창동 감독과 제작진의 논의를 거쳐 '남편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놀랍다. 나는 남편을 항상 오빠라고 부른다'는 취지로 번역하고, 이후에도 '오빠(Oppa)'라는 한국어 호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파켓 교수는 “한국어 단어를 자막에 그대로 남겨두면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보여줄 수 있다"며 “시청자들이 한국 문화에 대해 성급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존 드미타 넷플릭스 UCAN 글로벌 영어 콘텐츠 프로덕션 시니어 매니저도 “이야기의 배경을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라며 “원작이 가진 문화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시청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 美서 K콘텐츠 더빙 수요 급증…“AI는 보조 수단"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장면. 사진=넷플리스
한국 콘텐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해외 현지화 시장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넷플릭스에 따르면 지금까지 200편이 넘는 한국 콘텐츠가 글로벌 톱10에 올랐다. 전 세계 넷플릭스 구독자의 80%는 한국 콘텐츠를 시청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니 로스 넷플릭스 UCAN 콘텐츠 로컬라이제이션 디렉터는 “과거에는 일부 팬들이 한국 콘텐츠를 직접 찾아봤지만 이제는 일상적인 대화의 일부가 됐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꼽았다. 이 작품은 공개 후 첫 91일 동안 3억2510만회의 시청 수를 기록했다. 주제곡 '골든(Golden)'도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에서 8주 넘게 1위를 차지했다.
한국 콘텐츠의 영어 더빙 수요도 증가하고 있다. 로스 디렉터는 “미국에서 한국 콘텐츠의 영어 더빙 수요가 크게 늘었다"며 “새로운 제작 방식과 인재 양성 체계를 구축하고 협력 스튜디오 및 현지화 업체와의 네트워크도 확대했다"고 밝혔다.
번역과 더빙에 AI를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전문 인력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날 질의응답에서 넷플릭스 측은 “AI는 창작자와 전문가의 작업을 지원하는 도구가 될 것이며 이들을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섬세한 감정과 표현을 담은 작품은 사람만이 제대로 재현할 수 있다"며 “자막과 더빙은 기술이면서 동시에 예술이다. 현재 AI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과 넷플릭스는 2024년부터 국내 방송·영상 제작 전문 인력을 대상으로 '프로덕션 아카데미'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이날 오후에는 서울 홍릉 콘텐츠인재캠퍼스에서 업계 실무자를 대상으로 현지화 워크숍도 마련했다.
구경본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기반본부장은 “현지화는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대사에 담긴 감정과 창작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과정"이라며 “K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전문 인력과 산업 기반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