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폭염과 폭우, 전력망을 시험하는 복합 기후 리스크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5.08.19 10:59

손성호 한국전기연구원 미래전략실장

손성호

▲손성호 한국전기연구원 미래전략실장

지난 4월,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해 장마는 한 달 가까이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이 올라와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그 예측은 빗나갔다. 장마는 기상관측 이래 최악의 '마른장마'로 기록되며 초단기에 끝났고, 한반도는 곧바로 폭염에 휩싸였다. 전년 대비 20일이나 빠른 폭염 특보가 전국에 발령되었고, 7월 7일에 최대전력수요가 90GW를 돌파한 데에 이어, 7월 8일에는 수요가 95GW까지 치솟으며 역대 7월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이는 평년 7월 말~8월 초 수준으로, 폭염이 전력망에 가하는 부담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런데 폭염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반도는 예기치 못한 또 하나의 기후 재난을 맞았다. 7월 16일부터 쏟아진 기록적 폭우는 19명의 사망자와 9명의 실종자를 발생시켰고, 1만 3천 명 이상이 긴급 대피했다. 41,000여 가구가 정전을 겪었으며, 일부 변전소와 배전망은 침수 피해로 기능이 마비됐다. 불과 며칠 사이에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닥치며, 기후위기의 '급변성'이 전력계통의 복합 취약성을 드러낸 셈이다.


폭염은 변압기와 차단기의 과열로 절연물의 열화를 촉진해 고장 위험을 높인다. 송배전선로의 처짐 현상은 허용 전류를 감소시키고, 전압 강하나 출력 제한의 원인이 된다. 반면 폭우는 지중화된 배전망과 변전소를 침수시켜 설비를 정지시키고, 낙뢰·산사태 등으로 송전선로를 단절시킬 수 있다. 특히 장기간 침수된 변전소는 단순한 건조 작업만으로는 복구가 어렵고, 주요 설비를 교체해야 하므로 복구 기간이 수주 이상 길어질 수 있다.



최근 피해 지역에서는 일부 마을이 배전선로 단절로 수일간 고립되었고, 통신마저 끊기면서 복구 인력 투입이 지연됐다. 전력계통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기반시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교통·통신·상하수도와 함께 복합 붕괴 위험이 크다. 이번 폭우는 전력계통이 단일 장애가 아닌 '복합 인프라 위기' 속에서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해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2021년 독일과 벨기에에서는 기록적 폭우로 하천이 범람해 변전소 수십 곳이 침수되었고, 20만 명 이상이 정전을 겪었다. 이 사건은 전력망이 '물리적 홍수 위험지도'와 연동해 재배치 및 보강 설계를 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4월 스페인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 역시 복합 요인의 결과였다. 약 150만 가구의 전력 공급이 끊긴 원인은 “과전압에 의한 연쇄적 계통 불안정"이었다. 전압이 급격히 상승했음에도 이를 흡수하지 못해 발전기들이 연쇄 차단되었고, 태양광·풍력 비중이 60%에 달하는 상황에서 전압 안정성을 유지할 동기형 설비도 부족했다. 변동성 높은 재생에너지 출력 변화와 송전선로 과열 등 여러 요인이 겹쳐 계통이 붕괴한 것이다.




스페인의 사례와 이번 한국의 폭염·폭우 경험은, 전력계통이 기후위기의 '다중 스트레스'에 동시에 노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기후가 예측 불가능한 속도로 변하면서, 계통은 열·수해·재생에너지 변동성 등 복합적인 위협을 받는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실시간 계통 안정성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 ▲고온·침수 등 극한 환경에서도 견디는 전력기기 개발, ▲재생에너지 변동성을 제어할 수 있는 보조 장치(ESS·동기형 콘덴서 등) 확대, ▲변전소 방수·지반 보강 및 배전망 지중화, ▲재난 시 신속 복구가 가능한 예비 장비 확보가 필요하다. 또한 전력계통 계획 단계에서부터 폭염·폭우를 모두 반영한 '복합 기후 리스크 시나리오' 기반의 설계·운영이 필수다.


전력망은 단지 에너지를 전달하는 기술적 수단이 아니라, 국민의 일상과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기반이다. 폭염이든 폭우든, 기후위기가 던지는 경고를 외면한다면 다음 대규모 정전은 스페인이 아닌 우리가 겪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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