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 세탁기 전쟁 ③] K-가전 존재감 제로…‘갈라파고스’ 日 파고드는 차이나 머니

에너지경제신문 입력 2025.09.22 08:05

■ 일본 도쿄 대형매장 현장 취재 (1)

삼성 2007년 이후 철수 상태, LG 프리미엄 내세워 재진입 시도

파나소닉·히타치 日브랜드 장악…도시바·샤프 中·대만에 팔려

보급률 높고 소형 선호 ‘성숙기 가전시장’…中 ‘저가공세’ 활발

하이얼·메이디·하이센스·TCL 등 중국 가전기업들이 전세계 세탁기 시장을 거세게 몰아부치고 있다. 아직 글로벌 가전 리더십을 구축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따라오지 못했지만 물량과 자본을 앞세운 공세의 세기와 속도는 갈수록 강해지고 빨라지고 있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과 일본 도시바 가전사업부를 흡수하는 등 인수합병(M&A)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에너지경제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해외취재 지원을 받아 한국 가전기업의 '캐시카우'인 세탁기의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산 가전의 약진과 한국 브랜드에 대한 위협, 한국 가전기업의 대응 등 전반적인 상황 진단과 향후 전망을 분석·조명하는 해외기획 시리즈 '중국 세탁기의 글로벌화와 한국 기업의 대응 전략'을 연재한다. 아울러 주요시장인 미국·일본에서 한·중 세탁기 진출상과 현지기업들의 방어 움직임도 소개한다. <편집자주>


일본 도쿄 시내 요도바시카메라 매장 세탁기 '베스트 3' 코너를 중국 제품들이 휩쓸고 있다. 1위는 OEM 방식으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유통사 PB, 2위는

▲일본 도쿄 시내 요도바시카메라 매장 세탁기 '베스트 3' 코너를 중국 제품들이 휩쓸고 있다. 1위는 OEM 방식으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유통사 PB, 2위는 하이얼이 인수한 아쿠아, 3위는 하이센스가 각각 차지하고 있다.

[도쿄(일본)=여헌우 기자] “12kg 세탁이 가능하고 6kg 건조도 되는 최신형 제품입니다. 파나소닉과 히타치 제품이 성능이 제일 좋은 편입니다."



9일(현지시각) 일본 도쿄에 있는 전자제품 매장 요도바시카메라(Yodobashi Camera)에서 “제일 좋은 제품이 뭐냐"고 묻자 직원이 한 말이다. 한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제품보다 용량은 절반이고 성능도 떨어져 보였지만 가격은 40만엔(약 376만원) 안팎으로 매우 비쌌다. 그래서인지 좀처럼 고객들의 눈길을 받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세탁기 코너에 유독 사람이 몰린 곳이 있었다. 중국 하이얼 등이 2만~3만엔(약 18만8000원~28만2000원)대 제품을 전시한 공간이다. 많은 고객들이 4~5kg 안팎 세탁이 가능한 소형 통돌이 제품들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통신 서비스를 이용하면 포인트를 준다고 외치는 통신사 영업사원들까지 몰려 가뜩이나 좁은 매장이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일본 도쿄에 있는 요도바시카메라 세탁기 코너 전경. 제품들은 매우 좁은 곳에 몰아놓고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두는 게 일본 전자제품 매

▲일본 도쿄에 있는 요도바시카메라 세탁기 코너 전경. 제품들은 매우 좁은 곳에 몰아놓고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두는 게 일본 전자제품 매장들의 특징이다. 대부분 저렴한 소형 통돌이 제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거나 관심을 보였다. 사진=여헌우 기자.

일본 도쿄 시내 빅카메라 매장에 하이얼 세탁기가 전시돼 있다. 일본에서는 5kg 안팎 소형 세탁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진=여헌우 기자.

▲일본 도쿄 시내 빅카메라 매장에 하이얼 세탁기가 전시돼 있다. 일본에서는 5kg 안팎 소형 세탁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진=여헌우 기자.

같은날 방문한 빅카메라(Bic Camera) 매장에서도 '중국 세탁기 굴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이얼 제품이 곳곳에 자리 잡아 고객들을 유혹했다. 가격은 대부분 10만엔(약 94만원) 이하다. 아쿠아(AQUA) 브랜드는 모델 얼굴이 새겨진 전단지를 나눠주며 마케팅 활동을 전개 중이었다. 아쿠아는 일본 산요(Sanyo) 내 세탁기 브랜드였지만 2011년 중국 하이얼에 인수됐다.


다음날까지 도쿄 시내 전자제품 판매점들을 여럿 둘러보자 일본 세탁기 시장이 '갈라파고스화' 됐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야마다전기 매장의 경우 '12kg급' 세탁기를 따로 모아 전시하고 있었다. 이보다 큰 제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드럼보다 통돌이가 더 많았는데 대부분 5kg 안팎 세탁 기능을 제공한다. 2~3kg 짜리 더 작은 제품도 많았다.


일본, 특히 도쿄는 주거 공간이 협소한 경우가 많아 세탁기 설치 공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풀이된다. 야마다전기 내 한 영업사원은 드럼세탁기 문을 양쪽으로 열어 보이며 “공간 활용도가 높다"고 소개했다. 한국인이나 미국인들은 반대쪽으로 세탁기 문이 열려야 할 이유를 모를 수도 있다.


30대 여성 A씨는 “도쿄에 있는 원룸 중에는 세탁기를 들여놓기 힘들 정도로 좁은 집도 상당히 많다"고 설명했다.


일본 야마다전기가 만든 PB 브랜드 'RORO' 세탁기 이미지. 20만원대 저렴한 가격에 판매 중이고 현장에서 홍보도 많이 하고 있다. 일본 대형 유통사 PB

▲일본 야마다전기가 만든 PB 브랜드 'RORO' 세탁기 이미지. 20만원대 저렴한 가격에 판매 중이고 현장에서 홍보도 많이 하고 있다. 일본 대형 유통사 PB지만 OEM 방식으로 중국에서 제작된다. 사진=여헌우 기자.

요도바시카메라, 빅카메라, 야마다전기, 에디온(Edion) 등 대부분 대형 매장에는 '일본인 1일 평균 세탁 용량' 등을 홍보한 문구가 적혀있다. 하루 한 차례 빨래를 한다면 큰 용량 세탁기가 필요 없다는 뜻으로 읽혔다.


업체 별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했다. 크기, 종류, 브랜드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10만원대부터 400만원대까지 선택지도 너무 많다. 경쟁 상품들은 디자인과 모양이 거의 똑같아 브랜드 로고만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LABI 이케부쿠로 본점이나 규모가 큰 빅카메라·요도바시카메라 매장에는 각 업체별 영업사원이 나와 있는 경우도 많다. '샤프'나 '도시바' 옷을 입은 직원이 소비자들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제품 매장을 6곳 이상 방문했는데 가장 친절하게 응대해줬던 이는 소프트뱅크 인터넷 영업사원이었다. 약정 계약을 하면 세탁기를 싸게 살 수 있다 언급하면서 각 제품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상품성에 대한 판단은 쉽지 않아 보였다. 생김새와 용량이 똑같다보니 기업들은 '스테인리스 수조라 청결하다'거나 '플라즈마 클러스터 제균 탈취가 된다'는 식의 홍보 문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고가 제품만 자동 청소, 히터 센서 등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 중국 기업들은 '자본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대부분 가격이 저렴해 눈길을 끄는 제품은 하이얼이나 유통사 자체브랜드(PB) 제품이었다. RORO, 요도바시오리지널 등 통돌이는 10만~50만원 가량 가격에 판매 중이다.


요도바시카메라 이케하부로점에서 만난 30대 여성은 “(집이 좁아) 큰 세탁기가 필요 없다"며 “품질이 우수하고 가격이 저렴하면 충분하지 브랜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 도쿄 시내 빅카메라 매장 세탁기 코너에서 '아쿠아' 브랜드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마케팅 활동을 전개 중이다. 아쿠아는 원래 일본 산

▲일본 도쿄 시내 빅카메라 매장 세탁기 코너에서 '아쿠아' 브랜드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마케팅 활동을 전개 중이다. 아쿠아는 원래 일본 산요 산하였지만 중국 하이얼이 인수해 새롭게 선보인 브랜드다. 바로 옆에는 하이얼 세탁기가 보인다. 사진=여헌우 기자.

일본 도쿄 시내 요도바시카메라 매장 세탁기 코너. 히타치, 도시바, 아쿠아 등 다양한 브랜드 제품이 전시돼 있지만 디자인·용량은 대부분 비슷하다.

▲일본 도쿄 시내 요도바시카메라 매장 세탁기 코너. 히타치, 도시바, 아쿠아 등 다양한 브랜드 제품이 전시돼 있지만 디자인·용량은 대부분 비슷하다. 사진=여헌우 기자.

일본전기공업회(JEMA)에 따르면 일본에서 팔리는 세탁기의 평균 단가는 10년 전 대비 50% 이상 높아졌지만 아직 9만5000엔(약 89만원)에 머물러 있다.


일본 세탁기 시장은 상대적으로 성숙한 분야로 평가받는다. 보급률이 워낙 높고 소비자들 역시 고가 프리미엄 제품에 대한 수요가 많지는 않아서다. 시장조사기관 Morder Intelligence에 따르면 일본 세탁기 시장 규모는 올해 22억4000만달러(약 3조1200억원) 가량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2030년에는 24억8000만달러(약 3조4600억원)로 커질 전망이지만 연평균 성장률은 2% 수준에 불과하다.


브랜드별 점유율 순위를 보면 파나소닉과 히타치가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샤프와 도시바가 뒤를 바짝 쫓고 있지만 이들은 각각 대만 폭스콘과 중국 메이디에 인수된 곳들이다. 현지 언론들은 최근 하이얼의 현지 공략이 거세다고 보도하고 있어 중국 기업·자본이 일본 세탁기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분위기다.


'중국 세탁기 굴기'는 수입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Global Trade Atlas 자료를 보면 지난해 일본의 세탁기 수입액은 1552억6900만엔(약 1조4600억원)에 달하는데 이 중 중국(1368억9400만엔) 비중은 88.2%에 달한다.


갈라파고스화된 일본에서 한국 기업들은 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07년 세탁기를 포함한 가전 시장에서 공식 철수했다. LG전자는 올해 초부터 고가 라인업을 들여보내며 다시 시장 재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단계다.


일각에서는 일본 히타치가 가전 부문 매각을 추진하는 가운데 삼성전자가 인수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하이얼, 메이디 등 중국 업체들은 미국·일본 가전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사들이며 현지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며 “삼성·LG전자도 인수합병(M&A)을 통한 시장 진입 기회 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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