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플러스·발란·티메프 사태 주원인은 ‘유동성 위기’
“일률적 정산 주기 단축은 더 큰 재무적 위험 초래”
국내 유통 산업 전반에 판매 대금 정산 지연에 따른 유동성 위기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7월 티몬과 위메프 사태에 이어 올해 3월 홈플러스와 온라인 명품 플랫폼 발란에서 유통 업체 유동성 문제가 연이어 터졌다.
유통사가 입점한 판매자에게 제때 정산을 하지 않아 '제2의 티메프 사태'가 벌어지진 않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사후 대책으로 정산 기한 단축 등 규제 확대를 대안으로 내놨다. 학계에서는 “개별 기업의 경영상 문제를 전체 플랫폼에 대한 획일적 규제로 접근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경영학회와 한국마케팅학회는 7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국내 유통 플랫폼 생태계의 미래'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에서는 유통 플랫폼의 문제를 플랫폼 산업의 특성에서 찾는 것을 넘어 유통업계의 재무적 관점에서 분석한 발표가 눈길을 끌었다.

▲7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에서 열린 '국내 유통 플랫폼 생태계의 미래' 세미나 현장. /사진= 최태현 기자
정산 대금 미지급 사태, “정산 주기 문제보다 유동성 문제가 더 크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유병준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는 “위메프 사태, 홈플러스 사태는 특정 기업의 경영상 도덕성 문제이자 중과실의 문제이지, 거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어 유 교수는 “개별 기업의 문제를 정산 기한 단축 규제라는 반시장적 규제로 접근하면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선 강형구 한양대학교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홈플러스, 발란, 티메프 사태의 원인으로 '재무 관리'를 꼽았다. 홈플러스는 사모펀드의 무리한 차입경영과 기업 구조조정의 실패, 발란은 스타트업의 회계 부실과 유동성 관리 실패, 티메프는 이커머스 기업의 판매 대금 유용과 전자상거래상의 불공정 관행을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산 지연 사태를 플랫폼 산업의 특수성으로 국한해 해석하는 건 성급한 일반화라는 주장도 나왔다. 홈플러스 사태에서 확인하듯, 유동성 위기는 온라인 플랫폼 뿐 아니라 전통 오프라인 유통기업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리스크라는 설명이다.
강 교수는 “어음과 같이 국내 산업 전반에 쓰이는 자금 운용 방식, 즉 일정한 정산 주기를 활용한 단기 자금 조달 메커니즘이 위기 발생 시 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또 “획일적인 규제 적용보다는 핀포인트 대응이 중요하다"면서 “최근 정책 논의에서 '플랫폼'이라는 포괄적 개념으로 유통업 전체를 동일한 규제 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실제로는 기업별로 재무 구조, 정산 방식, 사업 모델이 다르기에 유동성 위험도 다르다"고 말했다. 유통업 내에서도 특수한 재무적 정산 방식이 다를 수 있는데도 같은 기준으로 규제를 해선 안된다는 지적이다.
강 교수는 기업의 구조적 재무 위험을 진단하는 조기경보체계 구축을 제안했다. 각 유통 플랫폼의 현금 소진율(Burn Rate)과 캐시 런웨이(Cash Runway) 같은 현금 흐름 기반 지표를 활용해 기업의 단기 유동성을 평가하고 이를 조기에 경고하는 체계를 구축하자는 제안이다.
정산 기한 단축 같은 천편일률적인 규제, 더 큰 위험에 직면
토론자로 나선 최정혜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는 “티메프나 알렛츠 등에서 발생한 문제는 정산 문제 자체보다 플랫폼사의 경영 실패와 재무 구조 악화가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당국에서 내놓는 정산 기한 단축 등은 취지는 공감하지만, 그와 별개로 쳔편일률적인 정산 기간 단축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 토론자로 나선 정주연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전문위원은 “지금 국회에서 논의되는 방향은 일정 규모 이상의 중개 플랫폼은 정산 기간을 단축하고 판매 대금을 별도 계좌에 보관하라는 방향"이라며 “실제 산업 현장에서 보면, 매우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스타트업 같은 경우는 규제를 준수하려면 심각한 유동성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며 “지금 논의되는 정산 주기 규제나 판매 대금 별도 관리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아닌 한국만의 고유한 규제"라고 꼬집어 말했다.